22.12.17(토)
오랜만에 한가한 토요일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축구를 하고 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막 아침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을 먹고 나면 보드게임을 하자고 했다. 흔쾌히 그러자고 하고 기다렸다. 아내는 그 전에 각자 할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자녀들이 각자 할 일을 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기다렸다. 슬슬 눈이 감겼다. 아내는 침대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라고 했다.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소파에 누워서 코까지 골았다. 아내는 이불을 꺼내서 덮어줬다.
할 일을 마친 소윤이와 시윤이가 보드게임은 언제 하는지 궁금해 하는 게 들렸다. 아내는 아빠가 주무시고 계시니 조금 기다리라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바로 보드게임에 임했다. 우노도 하고 루미큐브도 했다. 아내는 서윤이를 재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모처럼 느끼는 토요일의 여유였다. 원래 시윤이와 축구를 하러 갔어야 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못 갔다. 정작 나는 새벽부터 축구를 하고 왔는데 대낮에도 춥다는 이유로 축구를 못한다고 하는 게 조금 미안하긴 했다. 다행히 시윤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축구를 하러 가자고 얘기하지 않았고, 축구를 못 해서 아쉽다는 말만 했다.
잠깐 시내에 나갔다 오려고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내 옷을 산다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싶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바쁜 일정이 없으니 여유가 있어서 좋긴 했지만 또 집에만 있기는 싫은 모순의 감정이랄까.
K네 식구가 갑작스럽게 집에 오게 됐다. 나와 K는 일을 했고, 아내와 K의 아내는 성탄절에 할 찬양 연습에 매진했다. 자녀들은 블록을 가지고 놀았다. 나와 K는 주방, 아내와 K의 아내는 거실, 자녀들은 작은방에서 각각 서로에게 방해를 주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늦은 오후 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저녁을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K네 식구는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짧고 굵게 시간을 보내고 갔다.
좀 늦기는 했지만 우리도 당초의 계획대로 나가기로 했다. 동네에 있는 문구점부터 갔다. 며칠 전에 갔을 때 소윤이가 연필 하나를 자기 용돈으로 사겠다고 했는데 내가 약간 자제시켰다. 너무 충동적인 것 같다고. 자기 용돈으로 사는 거라 자유롭게 구매가 가능했지만, 이미 큰 돈을 써서 하나를 고르고 난 뒤라 그렇게 얘기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그게 성탄절 한정 디자인으로 나온 연필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사고 싶었던 거고. 조금 미안했다. 사 달라는 것도 아니었는데 제대로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은 것 같아서. 나가는 길에 거기부터 들러서 연필을 샀다. 다행히 엄청 인기가 있고 그런 건 아니라 (오히려 한정이 무색할 정도로 여유 있는) 무사히 구매를 했다.
옷을 구경하러 가기는 갔는데 별로 쇼핑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일단 자녀들과 함께 옷을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성가시다. 도착하자마자 셋 다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나에게 옷을 보고 있으라고 하고는 자기가 셋 모두를 데리고 갔다. 그래 봐야 나의 수고가 아내에게 옮겨졌을 뿐이다. 게다가 입어 본 옷이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다른 걸 입어 봐도 비슷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다른 매장으로 옮겨 가며 이것저것 입어 보는 건 너무 귀찮았다. 한 10분 보고 끝냈다.
“여보. 그냥 다음에 사자”
아내는 계속 조금 더 보라고 했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녀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점심에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는데 아마 소윤이와 시윤이가 엄청 많이 먹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서윤이는 아예 밥을 따로 안 먹이고 고구마만 조금 먹였다. 배가 고플 만했다. 바로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옷 가게에서 나오는데 도넛 가게가 보였다. 아주 소량의 도넛을 사서 나눠 먹었다. 꿀맛이었다. 중앙에 커다란 성탄 트리가 선 광장 한 편에 서서 다섯 식구가 한 입씩 도넛을 나눠 먹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궁상스럽다고 할 지도 모르지만, 나름 재밌고 맛있었다. 어느 정도 요기도 됐다.
하루 종일 밥을 안 먹어서 뭔가 한식 백반 같은 밥이 먹고 싶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아이들과 먹기 좋은 칼국수와 수제비를 파는 곳으로 정하고 갔는데,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우리를 향해 가게 안의 직원 분이 손가락으로 엑스 자를 그리셨다. 급히 검색을 해서 다른 식당을 찾았다. 우리가 원하던 찌개 같은 걸 파는 곳이었다. 거긴 아예 불이 꺼져 있었다. 아내와 내가 신혼 시절에 자주 갔던 카레 가게에 갔다. 다행히 거기는 아직 문을 닫기 전이었다. 대안의 대안으로 가게 됐지만 만족하고 나왔다. 아이들도 잘 먹었다.
커피를 사러 간 곳도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다른 곳을 찾아서 커피를 샀다. 그 전에 빵 가게도 들렀는데 거기도 문이 닫혀 있었다. 아내는 다른 빵 가게를 찾아서 빵을 샀다. 탐욕의 부부였다. 이 정도로 문이 닫혀 있고 안 맞으면 그냥 포기할 법도 한데 끝까지 대안을 찾아서 욕구를 해소하는 욕망의 부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