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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Mar 19. 2023

독감입니다

23.01.15(주일)

어제 아이들 방에서 잤다. 아내가 몸이 안 좋기도 했고, 아이들이 그립기도 했고. 밤 새 시윤이의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자다가 일어나서 시윤이가 괜찮은지 살펴 보기도 했는데, 잠결이기도 했고 특별한 증세가 보이지는 않아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여보. 몸은 좀 어때?”


라고 물어보는데 딱 봐도 어제보다 안 좋았다. 아내에게 들어 보니 새벽에 시윤이가 깨서 아내에게 갔는데 아내가 돌려보냈다고 했다. 아내는 이미 열이 나는 걸 확인한 뒤였다. 시윤이에게 옮을까 봐 일단 돌려보낸 거다. 아내의 체온은 39도가 넘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시윤이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체온을 재 보니 시윤이도 39도가 넘었다.


오랜만에 특급 비상이었다. 일단 교회를 다녀 와서 병원에 가 보기로 했다. 아내와 시윤이는 집에 있고, 소윤이와 서윤이만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아내에게는 예배시간이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얘기를 했다. 반주를 해야 해서 서윤이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언니와 함께 아동부 예배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했지만, 서윤이는 고민을 하다가도 결국에는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했다.


“서윤아. 그럼 아빠 드럼 칠 때 혼자 있어야 되는데 괜찮겠어?”

“네. 혼자 있뜰 뚜 있더여어”

“앞으로 막 나오고 그러면 안 되는데?”

“네. 안 갈 거에여어”


일단 연습할 때는 소윤이가 같이 있으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마침 K의 아내도 일찍 와 있었다. 소윤이는 아동부 예배당으로 가고 K의 아내가 서윤이를 맡아줬다. 덕분에 예배시간에도 서윤이는 얌전히 잘 앉아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부지런히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소윤이가 막 밥을 받아서 먹으려고 하던 참이었다. 예배 시간에 잠들었던 서윤이도 길게 자지 않고 깼다. 그렇게 된 김에 소윤이와 서윤이 밥은 먹여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막 깨서 기분이 좋지 않은 서윤이를 달래려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혹시 좀 빨리 와 줄 수 있어요?”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시윤이가 또 저혈당인 것처럼 손이랑 몸을 좀 떨어서”

“아, 진짜? 알았어. 바로 갈게”


시윤이는 공복이 길어지면 종종 비슷한 증세를 보이곤 했다. 아내와 나에게는 작년 1월의 서윤이 사건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시윤이의 그런 모습에 신경이 곤두 서는 건 물론이고 두려움도 엄습했다. 바로 소윤이에게 갔다.


“소윤아. 진짜 미안한데 우리 바로 가야겠다”

“왜여?”

“아, 시윤이가 좀 많이 아프다고 해서. 급히 가야겠어”


소윤이의 얼굴에 엄청난 아쉬움과 함께 동생이 아프니 당연히 가야 한다는 표정이 동시에 보였다.


서둘러 집에 왔을 때는 시윤이가 조금 안정(?)을 찾은 뒤였다. 아내가 급한 대로 과일주스를 조금 먹였다고 했다. 아내도 시윤이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집에 오면서 병원 두 곳에 전화를 해 봤다. 한 곳은 24시간 진료를 하는 곳이지만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고, 한 곳은 오늘 오후까지만 진료를 하는 곳인데 집에서 가까웠다. 바로 수액을 맞을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집에서 먼 곳은 오전 진료는 이미 끝났으니 오후에 맞아야 한다고 했다. 가까운 곳은 사람이 많아서 장담할 수는 없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가 보기로 했다.


사람이 정말 많긴 했다. 수액을 맞는 사람도 엄청 많았다. 그야말로 병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내는 더 기운을 잃었다. 시윤이가 손과 몸을 떨 때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어서 그렇지 사실은 아내도 시윤이 못지 않게 힘들었던 거다. 일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적고 기다렸다. 다행히 수액은 맞을 수 있다고 했다. 소윤이와 서윤이는 병원 입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소윤이가 엄청 큰 도움이 됐다. 믿을 만한 첫째 노릇을 톡톡히 했다. 아직 뭘 모르는 서윤이는 자기도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엄포를 섞어서 밖에서 기다리도록 했다.


소윤이와 서윤이는 점심을 먹여야 했다. 점심을 먹고 와도 아내와 시윤이 순서가 오지 않을 만큼 사람이 많았다. 소윤이와 서윤이를 데리고 같은 건물 1층에 있는 유부초밥 가게로 갔다. 난 전혀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소윤이와 서윤이만 먹었다.


“소윤아. 주일날 이게 무슨 난리야”

“그러게여”


소윤이는 나의 대화 상대 역할도 가능했다. 초특급 비상 상황이었지만 소윤이와 서윤이는 잘 먹어야 했고, 둘 모두 잘 먹었다. 다 먹고 다시 병원으로 올라갔다. 역시나 아내와 시윤이는 아직 진료를 받기 전이었다. 난 소윤이와 서윤이가 있는 문 바깥쪽과 시윤이와 아내가 있는 병원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아내와 시윤이 차례가 왔다. 아내와 시윤이는 이미 팔에 바늘을 꽂고 수액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대신 진료실에 들어갔다.


“독감이네요”

“둘 다요?”

“네 두 분 모두 독감이네요”


예상한 대로였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보니 병원 벽에 주사로 맞는 독감약 안내가 있었다.


“아, 선생님. 혹시 링거로 맞는 독감약은 수액이랑 같이 못 맞나요?”

“아니요. 같이 맞을 수는 있는데 그건 비급여예요”

“아, 같이 맞을 수는 있는 거예요? 그럼 그것도 같이 놔 주세요. 둘 다요”


몇 년 전에 내가 A형 독감에 걸렸을 때, 주사로 맞는 약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경험이 있었다. 먹는 약보다 월등하게 효과가 빠르고 좋아서 이번에도 기대를 품고 링거로 놔 달라고 했다. 시윤이는 집에서보다 좀 나아진 느낌이었고 아내는 완전히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실제로 아내는 병원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쓰러져 있었다. 난 잠시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수액을 다 맞으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그 시간 동안 소윤이와 서윤이를 데리고 병원에 있는 건 불가능 그리고 불필요 한 일이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또렷함 속의 몽롱함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진이 쭉 빠졌다.


“아빠. 우리 빙고하자여”


소윤이와 서윤이도 고생이긴 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요구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슬픔과 걱정에 잠긴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수액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멀쩡한 사람은 멀쩡한 일상을 보내는 게 더 자연스럽다.


“그래. 뭘로 하지?”

“우리 저번에 동물로 했었나?”

“어, 그랬지”

“그럼 이번에는 음식 하자여. 음식”

“그래 좋아”


서윤이는 옆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놀이를 했고, 소윤이와 나는 빈 종이에 스물 다섯 칸을 만들어서 음식 이름을 적었다. 소윤이와 음식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씩 지우는데 눈이 감겼다. 무슨 정신으로 빙고를 했는지 모르겠다. 소윤이도 내가 불쌍했는지 한 판만 하고는 더 하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소윤이에게 좀 미안했다. 소윤이는 서윤이와 놀고 난 소파에서 정신을 못 차릴 때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아마 30분 정도 있으면 어느 정도 다 맞을 것 같다고 하시네요”


다시 채비를 해서 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둘 다 활력이 있고 그런 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아픈 사람 같기는 했지만 링거를 맞기 전처럼 기력이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윤이는 엄청 과묵해졌다. 말이 없었다. 집으로 오면서 죽을 한 그릇 포장했다. 시윤이는 전혀 식욕이 없었지만 그래도 뭘 먹기는 해야 했다. 아내도 마찬가지였고. 서윤이는 자기도 죽을 먹고 싶다면서 땡깡을 피웠다. 서윤이는 저녁 먹을 시간이 아니라서 저녁에 주겠다고 했다.


아내와 시윤이는 격리생활을 했다. 한 집에서 살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떨어져 지내자는 게 아내의 뜻이었다. 아내와 시윤이는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웬만하면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의 품이 그리운 서윤이는 계속 안방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때로는 펑펑 울기도 했고.


시윤이는 답답하긴 해도 은근히 좋기도 한 눈치였다. 하루 종일 엄마를 독점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크게 답답해 하지도 않았다. 방 안에서 엄마와 잘 지내는 듯했다. 잘 지낸다고 하기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들기는 했지만.


밤에 자는 자리도 바꿨다. 아내와 시윤이는 그대로 안방에서 자고 난 소윤이와 서윤이가 자는 방에서 잤다. 서윤이는 오빠가 자던 침대 1층에서 자고 싶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꿔서 자기도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다. 아마도 처음이 아닌가 싶다. 소윤이, 서윤이, 나의 조합은. 딸 둘 사이에 껴서 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엄청 좋았다. 마음이 엄청 풍요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소윤이나 서윤이 옆에서 잘 때와는 또 다른, 딸 부자여서 든든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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