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02(토)
아내를 거의 11시까지 재웠다. 내가 컨디션이 좋고, 기분이 괜찮을 때는 아내를 오래 재우면 재울수록 뭔가 좋은 남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물론 그렇지 않은 상태일 때는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피어오르기도 하지만)
오전과 이른 오후까지는 집에서 평소와 같은 일상의 시간을 보냈다. 밥 먹이고, 놀고, 똥 닦고, 잠시나마 쉬어볼까 시야에서 숨었다가 발각되고. 아내가 퍼즐 맞추기로 한참을 소윤이랑 노는 동안, 난 잠시 눈치를 보며 책상에 앉아 할 일을 하기도 했다.
"어. 시윤아. 엄마한테 가 봐.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
"엄마아"
"어. 시윤아. 아빠한테 가 봐. 누나랑 퍼즐 하고 있으니까"
"아빠아"
시윤이는 아내와 나 사이를 이리저리 방황하는 와중에도 기분 좋게 잘 지냈다.
오후에는 친구 아내가 운영하는 공방에 가보기로 했다. 아내는 오늘도 시윤이와의 낮잠 씨름에서 패배했지만, 내가 있을 때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게다가 공방에 가는 동안 재우면 되니까.
가는 길에 친구 집에 들러 친구를 태워서 갔다. 친구는 조수석에 앉으며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뽀로로 주스 두 개. 시윤이 것도 사 오다니. 시윤이에게 뽀로로 주스 같은 걸(이를 테면 초콜렛, 사탕, 심하게 단 과자 등) 대놓고 준 적은 아직 없다.
"우와. 삼촌이 뽀로로 주스 사 오셨네"
다행히 시윤이는 곤히 자고 있어서 뽀로로 주스의 등장을 모르고 넘어갔다. 소윤이만 노났다. 시윤이는 공방에 도착하자마자 깼다.
애들이 온다고 고구마를 구워 놨길래 가자마자 앉아서 고구마를 흡입했다. 물론 애들이. 따로 점심을 안 먹여서 그런가 정신없이 먹었다. 소윤이는 고구마는 물론이고 사탕, 초콜렛도.
소윤이는 말하는 대로 다 이뤄주는 지니 같은 이모에게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삼촌도 똑같이 했는데, 삼촌은 아니었고 이모는 맞았다. 이모는 졸졸 따라다니면서 삼촌은 손을 내밀어도 거절했다. 좀 크더니 이런 게 생겼다. 잘 모르는 사람이어도 이모한테는 금방 마음을 열면서, 몇 번 본 사이여도 삼촌은 경계하고 그런 거.
고구마 유효기간(?)이 끝나고 난 뒤에는 여지없이 밖으로 끌려나갔다. 공방의 특성상 매장 안에는 너무 깨질 만한 것도 많았고, 설사 그런 게 없다고 했더라도 강시윤이 내 팔을 격렬하게 잡아끌었다.
"아자. 아자. 아자(가자)"
날이 춥기는 했는데 그래도 시골스러운 한적한 분위기에서 좋은 공기(진짜 좋았는지는 모르지만, 기분상)를 마시니 좋긴 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도 오랜만에 넓은 곳을 돌아다니니 좋아 보였고.
"소윤아. 아빠는 이런 데 살고 싶다"
"아빠. 나도여"
"소윤이도?"
"네. 여기 좋다여. 앞에 모래도 많고"
언제쯤 아파트 숲을 벗어날 수 있을까. 별로 한 건 없고 그냥 꽁무니만 쫓아다녔지만 그것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긴 해서, 슬슬 지쳐갈 때쯤 아내가 나왔다. 가게를 지켜야 해서 친구네 부부랑 밥을 먹지는 못하고 헤어졌다.
"아빠. 여기가 해나 이모네 가게야?"
"해나 이모? 해나 이모가 아니라 은지 이몬데?"
"아. 그래?"
"은지 이모 좋았어?"
"응"
"왜?"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러니까"
역시 소윤이한테는 맛있는 거 주는 사람이 최고인가 보다.
근처에 있는 콩요리 전문점에 가서 밥을 먹었다. [헤이리 맛집]을 치면 많이 검색되고, 뭔가 실속 없는 유명식당인 듯한 느낌에 비해서는 꽤 질이 좋은 맛집이었다. 콩요리라 애들이랑 먹기에도 좋고. 내 일기에서 애들이랑 먹기 좋았다는 건, 애들이 먹기 좋았다는 뜻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아내랑 내가 배부르게, 끝까지 먹었다는 의미가 더 크다. 오늘도 애들은 그냥저냥 먹고 나랑 아내만 엄청 맛있게 먹었다. 아, 물론 그렇다고 엄청 격을 갖추며 수월히 먹었다는 뜻도 아니다. 다 먹고 나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휴지와 물티슈가, 얼마나 치열한 시간이었는지 증명해주는 전리품으로 남곤 한다.
밥 먹고 나서는 아내의 [빵집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있던 빵이 맛있는 카페에 갔다. 밥은 잘 안 먹더니 둘 다 빵으로 배를 채웠다. 나는 배가 부르기도 했지만, 설령 배가 고팠더라도 두 녀석이 빵 먹는 모습을 보고는 차마 빵에 손을 대기 힘들었을 거다.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집에서 나온 시간이 늦어서 그런가, 집에 돌아갈 때쯤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오늘도 둘 다 잠든 줄 알았는데, 소윤이는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자는 척을 했다.
"소윤아. 왜 자는 척 해?"
"크크크크크"
시윤이는 그대로 눕혔고, 소윤이 옆에는 아내가 누웠다. 난 나왔고. 금방 조용해졌는데도 아내는 나오지 않았다. 왠지 아내가 먼저 잠들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아내가 부스스한 얼굴로 등장했다.
"잠들었어?"
"어. 근데 소윤이도 금방 안 잤어"
아내는 외출복도 못 갈아입은 상태로 끌려들어 갔다가 나온 거였다. 물론 아내는 바로 환복 및 세면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뭔가를 했다. 나는 방에 있었고.
"여보. 뭐해? 웹툰?"
"아니. 그냥 인터넷 뉴스 보고 있어"
한 30여분 뒤
"여보. 지금은 뭐해?"
"웹툰 봐"
중간중간 뜬금없이 나한테 와서 애교를 부리고 안고 가고 그랬다. 아내의 이런 모습이 굉장히 생소한 건 아니지만(원래 애교가 많고 살가운 성격이니까) 그렇다고 또 엄청 익숙한 모습은 아니다.(애 둘 육아로 인해 상실한 천성 중 하나니까) 아내의 예고 없는 다정함에 본능으로 반응하기보다 '뭐지. 왜 이러지' 라며 의도를 파악하기 바쁜 내 모습에 세월을 실감했다. 내 추측으로는 얼마 전에 해 본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 테스트에서 내 사랑의 언어가 '스킨십'이라는 게 갑자기 뇌리에 박혀서 급히 벼락치기로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봐야 하는 웹툰을 다 봤는지 아내가 기지개를 켜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으으으으으으"
"웹툰 다 봤어?"
"어"
꽤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여전히 외출복 차림이었던 아내가 내게 다가오며 얘기했다.
"그래도 오늘은 애들이 안 깨고 잘 자네?"
"안 깨긴 뭘 안 깨. 내가 예언해볼까? 시윤이가 울면서 문을 열고 나오고 여보는 시윤이한테 잠깐만 씻고 옷 갈아 입고 들어간다고 얘기하고 부리나케 움직인 다음 끌려 들어가겠지"
"그런가?"
맙소사. 이 대화를 나눈 지 5분여 뒤에 시윤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뒤는 나의 예언 그대로였다. 말이 씨가 된 걸까, 이미 씨였던 걸 말한 걸까. 아무튼 아내는 그대로 이불행.
아싸리. 그래도 아직 토요일이다. 시윤아. 아빠는 즐겁다. 아직 토요일이니까. 아직 4일이나 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