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인에게 연휴란

19.02.03(주일)

by 어깨아빠

밥이 없었다. 그렇다고 밥을 하기에는 오늘부터 너무 장기간 집을 비워야 했다.


"여보. 토스트 먹이자"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지만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불량한(?) 심산을 파악했는지 둘 다 잘 먹지는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바로 파주(처갓댁)에 가기로 했으니, 애들한테 한복을 입혔다. 아내랑 나는 금요일부터 휴일이었고 오늘도 부모님 댁에 가는 거라 나름 기분이 났다.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나 보다. 이전 명절 때는 한복 입은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건 소윤이와 시윤이뿐이었다. 아내 말로는 새싹 꿈나무에 소윤이 데려다줄 때, 선생님 얼굴에서 약간의 당황이 엿보였단다.


'아. 우리가 너무 오버했구나'


라는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대신 한복의 자태를 열심히 추켜 세웠다.


"우와. 우리 소윤이, 시윤이 한복 잘 어울리네. 엄청 예쁘네"


고운 한복을 입은 것과 상관없이, 시윤이는 오늘도 반항아였다. 결국 아내가 자모실로 데리고 갔다.


교회 식당이 쉬어서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요즘은 약간 혼란의 시기다. 넷이 가서 두 가지 음식을 시키면 모자를 때가 있고, 반대로 세 가지를 시키면(아직 1인 1 메뉴까지 가지는 않았다) 남을 때도 있고. 약간의 도박이 필요하다. 오늘은 실패였다. 생면국수, 돈까스, 오므라이스를 시켰는데 애들이 영 시원찮았다. 결국 아내랑 나만 배 터지게 먹고 말았다.


거기에 시윤이는 모두 식사를 마치기도 전부터 소란을 피워서 내가 먼저 데리고 나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차에 앉아 기다렸다. 시윤이는 움직이지도 않는 차에 앉아서도 눈을 막 비비며 잠을 청했다. 아내랑 소윤이가 차에 돌아왔을 쯤에는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다.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집에 오지 않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짐을 챙겨서 나와야 했다. 집을 떠나는 날이 기니 짐도 많았고, 안 그래도 분주한 아침에 그것까지 챙기려니 너무 바빴다. 시윤이도 잠들었으니 내가 소윤이, 시윤이와 함께 카페에서 기다리고 아내만 혼자 집에 갔다 오기로 했다. 시윤이를 무사히 유모차로 옮기고 소윤이랑 자리를 잡았다.


"아빠. 우리 편의점 갔다 올까여?"

"오늘은 못 가"

"왜여?"

"시윤이 잠들었잖아"

"같이 데리고 가면 되지여"

"그러다 깨면 어떻게 해"

"아빠. 그래도여"

"안 된다니까"

"아빠아아. 그래도여어어"

"그럼 소윤이도 여기 있을래?"

"왜여?"

"아빠가 얼른 뛰어갔다 오게"

"그래여"

"절대 움직이면 안 돼. 가만히 앉아 있어야 돼"


후다닥 달려가서 초코송이와 우유를 하나 사서 돌아갔다. 소윤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가면서.


"으잉? 초코송이? 왜 그거 사 왔어여?"

"그냥. 소윤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소윤이는 아주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순식간에 초코송이를 먹어 치웠다. 초코송이의 증발과 함께 할 일이 없어진 소윤이가 자리를 이탈해 조금 돌아다니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얼핏 얼핏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해 보니, 또래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별 하는 일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소윤이가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길래 뭐하나 가서 봤더니, 엄마와 함께 온 어느 여자 아이 옆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 동냥이라고 해야 하나.


"소윤아.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자리로 가자"

"아. 괜찮아요. 제가 놀라고 했어요"


아이 엄마가 대신 대답을 했다. 멋쩍은 웃음을 남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시윤이는 잘 자고 있었다. 책이라도 한 권 들고 올 걸,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내는 챙길 짐도 많고, 난장판인 집도 조금 치우고 오는지 꽤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소윤이는 계속 남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시 가보니 이번에는 아예 자기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소윤아. 니가 들고 있으면 어떻게 해. 친구 건데"

"아니야. 언니가 나 보라고 했어"


휴대폰 주인인 그 언니는 오히려 엄마랑 얘기하며 놀고 있고, 소윤이만 거기 앉아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아.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저희 갈 때 돌려보낼게요"


빈 말은 아닌 듯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안 돼서 시윤이가 깼다. 시윤이를 안고 다시 소윤이에게 갔다.


"소윤아. 시윤이도 깼어. 이제 곧 엄마 오신다니까 가자"


소윤이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영상에 빠져 귀를 닫은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 아이와 엄마가 갈 때가 되어서야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왔다. 곧 아내도 오고. 소윤이한테 동영상 볼 때, 나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한 것에 대해 얘기하고 주의를 줬다. 엄마, 아빠가 영상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느지막한 오후쯤 파주로 출발했다. 처갓댁 입성과 함께 자유를 얻었고, 동시에 빡빡한 일정이 시작됐다. 먹부림 일정.


"여보. 이제부터 시작이야"

"뭐가?"

"쉴 틈 없이 먹는 거"


아내와 나는 앉아서 먹고, 소윤이랑 시윤이는 정신없이 뛰어놀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명절 음식 준비하고 손주들 시중드느라 바쁘고.


소윤이야 당연히 그렇다 치고, 시윤이도 이제 나름의 존재감과 애정 지분을 많이 확보했다. 오늘도 처갓댁에 들어서자마자


"하버. 하버(할아버지)"


를 외치며 장인어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서 안겼다. 밥 먹을 때도 할아버지 옆에 가겠다고 하버하버. 잘 놀다가 뜬금없이 하버하버. 이러니 할아버지가 사르르 녹을 수밖에 없다. 소윤이가 고인물이라면 시윤이는 청정수. 다만 청정수 치고는 고인물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하는 느낌이랄까.


사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면서 동시에 며느리, 큰아들이었다. 아내의 할머니와 작은아버님 내외가 내일 오실 예정이라 (소규모지만) 명절 음식 준비하느라 바쁘셨을 거다. 그 상황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 첫째 손주와 요구사항은 많은데 온전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둘째 손주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없으셨을 거다.


아내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육아에 함께하지 않았다. 유체이탈인가.


"소윤아. 엄마 엉덩이가 소파에 붙었나 봐"

"왜여?"

"음, 안 움직여"


소윤아. 너도 자식 낳아서 엄마, 아빠 집에 와 보면 알 거야.


소윤이는, 오늘 밤을 포함해 두 밤이나 파주 할머니 집에서 자고, 그 뒤에는 신림동 할머니 집에서도 하룻밤을 잔다는 걸 알고 있던 덕분인지 순순히 잠자리에 응했다. 물론 평소보다는 훨씬 늦은 시간이었으니 당연한 처사지만.


오늘도 문제는 시윤이. 데리고 들어가서 1시간 30분 동안 밀고 당겼지만, 결국 아내와 내가 졌다. 차라리 졸린 내색이라도 안 하면 애초에 재울 생각을 안 했을 텐데, 격렬하게 눈 비비고, 금방이라도 잘 것처럼 껌뻑거리니 거기에 속은 거다. 울려서라도 재워 보려고 약간의 분노가 담긴 딱밤을 선사한다는 게 눈두덩이에 맞았는지 시윤이가 서럽게 울었다. 그 소리를 들은 장인어른이 방에 들어와 시윤이의 조력자가 되어 주셨다. 시윤이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거실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방에 있을 때는 막 짜증 내면서 온갖 난폭한 행위를 일삼더니, 거실로 나오니까 할아버지 품에 폭 안겨서 꼼짝도 안 했다.


아내와 나는 영화를 예매했었다. 시간은 임박했고. 할아버지 품에 안겨 불쌍한 눈빛을 발사하는 시윤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내랑 손잡고(방해꾼들 없이) 걷는 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가식 아님, 립서비스 아님, 연기 아님)


영화 다 보고 갔더니, 장모님이 거실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아내와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깨셨다. 시윤이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다가 방향을 바꿔 TV를 보더니 그대로 잠들었다고 했다. 그럴 거면 애초에 졸린 연기를 하지 말던가. 엄마, 아빠 약 올리고 자면 더 달콤하냐 짜식아.


1시간 30분을 씨름하고 나왔을 때는


"여보. 강시윤 징하다 징해"


라며 학을 뗐으면서, 영화 보고 와서 애들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니 또 애정이 폭발했다. 자고 있는 애들 볼 쓰다듬고, 손 잡고, 발 잡고. 뒤척이는 애들 쫓아다니며 뽀뽀하고. 보통 이런 순간은 기록에도 기억에도 잘 남지 않지만, 의외로 이런 순간이 힘든 기억을 먹어 치우고 고된 하루를 버티게 만들기도 한다. 자고 있는 애들 손과 발을 조몰락거릴 때마다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까. 오래갔으면 좋겠다'


물론 낮에는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언제쯤 아내랑 오붓하게 지내보나'


명절 특수로 인해 보통의 날과 다르게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온 오늘은, 간절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소원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


'하나님. 매일 명절 연휴였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아직 3일이나 남았다. 기뻐하자.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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