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04(월)
부모님 댁에서 자면 언제나 그렇듯, 소윤이와 시윤이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장인어른, 장모님은 그보다 빨리 일어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내랑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소윤이가 예전에는 아내와 나를 깨우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노는 와중에도 우리를 깨운다. 일어나긴 했지만 더 누워 있고 싶어서 이불속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소윤이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어? 아빠 일어났다. 아빠 나와여"
"소윤아. 아빠 조금 더 자고"
"아아아. 얼른 나와여"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무지 바쁘셨다. 손주 육아와 함께 아침 식사 준비, 명절 음식 준비까지 하시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셨지만, 늘 감사한 건 그래도 항상 육아를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내 입장에선 이게 제일 중요함) 소윤이, 시윤이가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 복은 타고났다.
집에 TV도 없고, 휴대폰 영상도 안 보여주니 평소에는 동영상을 볼 기회가 없는 소윤이는 할머니 집에 가면 '뭐, 재밌는 거'를 틀어달라고 한다. 수많은 컨텐츠 중에 내용의 적절성, 선정성, 자극성 등을 고려해서 골라야 하는데 아내랑 나도 본 게 없으니 지식이 없다. 그래서 주로 틀어주는 게 뽀로로랑 타요다. 요즘 자동차만 보면 흥분하는 시윤이 덕분에 오늘은 타요. [시즌1 1화]를 틀어주고 같이 앉아서 봤다.
?
타요가 이렇게 재밌다는 걸 처음 알았다. 타요 타요 말만 들었지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는데 정말 집중해서 봤다. 뽀로로는 엄청 지겹던데, 타요는 아니었다. 소윤이한테 각 10분짜리 두 편만 보여주기로 약속했는데, 내가 궁금해서 더 보고 싶었다. 타요가 진정한 명작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윤이는 자동차가 나오니까 "빠방. 빠방" "뻐. 뻐(버스)" 를 연호하며 집중했다. 소윤이도 마찬가지로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몰입했다. 청양고추를 사과라고 속여서 먹여도 모를 것 같은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그 사이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열심히 전을 부치셨다. 뭐 도와드릴 게 없냐고 물었지만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다. 잠시 후 아내도 나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역시 같은 답을 받았다. 난 바로 다시 앉았는데, 아내는 나랑 달랐다.
"엄마. 이거 내가 부칠까요?"
CEO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여기 있었네. 어느 공간, 어느 순간이든 일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아침 먹고, 과일 먹고, 장인어른이 소윤이랑 나가서 사 온 커피도 마시고. 그러고 나니 또 점심시간.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나도 벅찬데 준비하시는 부모님들은 어떠실까 싶었다. 장모님은 외식을 제안하셨다.
"그래도 한 끼는 밖에서 먹어야지. 계속 집에서 먹으면 지겨워. 가영이랑 강서방이랑 뭐 먹고 싶은지 얘기해서 정해. 상큼한 걸로"
상큼이라.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진짜 상큼한 거. 이를 테면, 엄청 fresh 한 샐러드라든가, 과일을 듬뿍 사용한 어떤 퓨전요리라든가. 이게 아니라면, '상큼'은 그저 느끼함, 육류 등의 조건이 배제된 모든 음식을 통칭하는 장모님만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비춰볼 때, 후자가 확실했다.
일단 나갔다. 설 전날이라 문을 연 식당이라도 있으면 감사할 판이었다. 걸어가다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가영아. 너 저번에 등촌 먹고 싶다고 했잖아. 거기 가던가"
등촌이라 함은 [등촌 샤브샤브 칼국수]를 뜻한다. 과연 어느 구석에 상큼이 숨어 있을까 고심했는데, 찍어 먹는 소스가 상큼하다고 결론지었다. 나 혼자. 아무튼 샤브샤브가 유력 메뉴로 등극하는 순간, 절망스러웠다. 처갓댁에 가서 외식하면 가장 많이 먹은 메뉴가 샤브샤브랑 돈까스다. (정확한 통계치는 없고, 그냥 내 감과 느낌일 뿐이다) 그나마 돈까스는 내가 워낙 좋아하니까 괜찮지만, 샤브샤브는 약간 질렸다. 원래 가장 선호하는 메뉴가 아니기도 하고. 내색은 하지 않고 속으로 낙심하고 있었다.
"아이. 문 닫았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샤브샤브야 꺼져라. 대부분 문을 닫고 그나마 문 연 곳은 카페 거나 카페를 겸하는 브런치 가게였다. 결국 우리도 브런치. 아침을 워낙 든든히 먹어서 모두 전혀 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였다. 아내가 음식 네 개를 시킨다길래 너무 많지 않겠냐고 우려를 표했다. 아내는 네 개를 시켰고, 결국 다 먹었다. 시윤이가 밥 먹는 내내 잔 덕분에 식사 시간의 질도 좋았다.
장모님은 오전에 커피를 사다 먹은 카페에 또 가자고 하셨지만, 아내가 반대했다. 굳이 [1일 2 카페]를 할 필요가 있냐는 이유와 함께 그래도 갈 거라면 갔던 카페는 싫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아내가 헤이리를 제안했다. 장모님이 아내한테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곳이 있었는데, 지난 토요일에 아내랑 내가 먼저 다녀왔었다.
"엄마. 아니면 헤이리에 거기 갈래요? 엄마 가보고 싶다고 하셨던 곳"
"헤이리?"
"네. 저녁에 할 일 많으면 그냥 근처 카페 가고요"
"니가 가고 싶구나"
"아니에요. 난 엄마가 가고 싶다니까 그런 거지. 난 상관없다니까요"
"그래 뭐 다섯 시 정도까지만 오면 되니까. 충분하겠네"
그때 시간이 한 3시 30분이 좀 넘었었다. 장인어른과 아내가 동시에 불가능을 지적했다.
"여보. 지금 가면 아무리 빨라도 6시는 돼야 오지"
"엄마. 다섯 시는 좀 너무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지만 입 다물고 있었다. 아내의 시간관념과 계산법은 장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게 확실하다. 장모님은 여섯 시여도 상관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헤이리로 출발.
"아빠. 우리 어디 가는 거에여?"
"그때 영주 삼촌 만나고 갔던 카페"
"거기 빵 먹었던 곳?"
"어. 맞아"
우리처럼 3대가 함께하는 가족이 많이 보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없이 애만 데리고 온 부부도 많이 보였고. 햇빛 가리개를 잔뜩 내리고 거기에 얇은 담요까지 덮어서 완벽한 차광, 차음을 시도한 유모차도 여럿 보였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겸상하고 있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애초에 그런 기대를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이게 나은 거 같기도 했다. 갖은 노력에도 재우기에 실패했는지 엄마, 아빠 누구도 앉아 있지 못하고 번갈아 우는 아이를 달래는 어느 부부의 모습을 보며 더 그렇게 생각했다.
시윤이는 빵을 먹을 만큼 먹고 나니 역시나 나가겠다고 용을 썼다. 소윤이도 좀이 쑤시는지 앉아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장인어른이 시윤이, 내가 소윤이를 데리고 밖에 나갔는데 의외로 광장같이 넓은 공간이 있었다. 날은 매우 추웠지만 놀게 뒀다. 양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소윤이, 시윤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꽤 오래 밖에서 놀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또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아내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아무튼 우리가 가면 한 끼 한 끼를 허투루 대하시는 법이 없으신 장모님은 저녁에는 닭도리탕을 준비하셨다. 밤에 (아내의) 작은 아버님네와 (아내의) 할머니가 오시기로 했고, 회를 떠 온다고 하셨다. 그걸 먹으려면 닭도리탕을 어느 정도 자제해야 했는데, 한낱 어리석은 욕망의 결정체에 불과한 나는 게 눈 감추듯 닭도리탕을 흡입했다. 배 부르지 않게 먹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배가 불러 있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우호 관계였다가 적대 관계였다가를 반복했다. 그 중심에는 앉아서 발로 밀면 앞으로 나가는 자동차가 있었다. 서로 운전석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싸움이 전개됐다. 혹여라도 깜빡하고 자리를 비우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와서 운전석을 쟁탈하는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안 받아도 될 스트레스를 받았다. 둘 다. 말이 좀 되는 소윤이는
"아빠. 저거 인형 좀 갖다 주세여"
"니가 와서 가지고 가"
"나 나가면 여기 시윤이가 앉는단 말이에여"
라며 날 부려먹었다. 그러다가도 둘이 죽이 맞으면, 한 명은 뒤에 앉아(뒤에 앉는 건 주로 시윤이었다) 승객처럼 행세했다. 내가 무슨 국제 평화 유지군도 아니고, 분쟁이 있을 때마다 서로 나에게 와서 하소연하기 바빴다.
"아빠. 시윤이가 내가 하고 있었는데 뺏었대여"
"아빠아. 아빠아아앙"
가급적이면 개입하지 않고 둘이 합의를 보는 쪽으로 유도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윤이가 많이 양보하고 참아주고 있다. 특히 요즘은 시윤이가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다.
"소윤아. 고마워. 양보해 줘서"
"나도 하고 싶은데 참고 양보한 거야"
"그래. 알아. 진짜 진짜 고마워"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아내나 내가 양보 안 해도 된다고 얘기해도, 괜찮다며 시윤이에게 우선권을 줄 때가 꽤 많다. 물론 100% 내켜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소윤이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려고 하지만, 쉽지는 않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소윤이에게 양보를 권하려고 하자, 아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윤아. 자. 여기. 너 해"
라길래 아내가 물었다.
"소윤아. 왜 양보했어?"
"어차피 양보 안 하면 엄마랑 얘기해야 되니까"
어쩌면 저 말 한마디에 요즘 소윤이의 하루가 다 담겨있는 것 같다. 본인이 정한 건 아니어도 어쨌든 누나로 태어났으니 짊어져야 할 사명인 건 분명하지만 최대한 마음의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보듬어 주고 싶다. 물론 쉽지는 않다.
평소보다 아주 많이 늦은 시간이 잠자리에 들었다. 장인어른은 작은아버님과 할머니에게 손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신 듯했지만, 아내와 나는 모른 척했다. 어제의 경험을 떠올리며 오늘은 굳이 시윤이랑 씨름하지 않고, 차라리 빨리 데리고 나오자고 아내랑 얘기를 나눴다.
역시나 소윤이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시윤이도 무척 졸려 보였다. 졸리면 빨리 자면 될 것을 자꾸 잠과 싸워 이겨내려 하고 있었다. 결국 승리했는지 갑자기 활력을 찾고 어둠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려 했다
"어허. 강시윤. 얼른 누워"
"아아아아"
"어허. 누가"
"아아아아아"
하아. 아니 이럴 거면 애초에 졸린 것처럼 연기를 하지 말던가. 지가 졸리다고 시그널을 보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고. 이 강시윤아. 진짜로 그렇다. 애초에 안 잘 것 같으면 그냥 늦게 재우기를 각오하고 시도도 안 할 텐데, 우리 애들은 그렇지가 않다. 진짜 졸려 보인다. 금방이라도 잘 것 같단 말이다. 누워서도 잘 듯 말 듯 외줄 타기가 이어진다. 그렇게 1시간 30분이 흘렀다. 진심이 꽤 섞인 분노의 딱밤을 시윤이에게 날렸다. 힘이 너무 셌는지 시윤이가 서럽게 울었다. 동시에 장인어른이 들어오셨다.
예측하건대, 이때 장인어른의 심리는 이랬을 거다. 소윤이 때는 경험하지 못한 [할아버지부터 찾는 손주]에 대한 애정과 [할아버지 품에서 잠드는 손주]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그런 모습을 작은아버님과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
시윤이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갔고 장인어른은 함박웃음으로 안아주셨다. 거실에는 이미 작은 아버님네와 할머니가 와 계셨다. 덕분에 시윤이는 모두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했다. 그 와중에 시윤이는 나한테 먼저 와서 안기고 애교를 부렸다. 이게 강시윤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애가 넉살이 너무 좋다. 확실히 강소윤은 나를 닮고, 시윤이는 아내를 닮았다.
여러 어른들의 기쁨조 역할을 수행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한참을 안 자다가 거의 1시가 다 되어서야 잠들었다.
흑흑. 여보. 우린 정말 잠 많은 아이는 인연이 없나 봐. 왜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