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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ul 21. 2023

하와이를 꿈꿨던 10년 전

23.02.23(목)

결혼기념일이었다. 무려 10주년 결혼기념일. 뭔가 상징적이고 엄청난 숫자 같고, 오랜 세월처럼 느껴졌던 ’10’이라는 숫자가 아내와 나에게도 현실이 됐다. 10년 전에 결혼식을 끝내고 하와이에 가서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여보. 너무 좋다. 10년 뒤에는 우리 애들이랑 같이 오자”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반 배정을 받고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하는데 희망하는 대학이 있냐고 물어보셔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육군사관학교요”


담임 선생님은 한동안 말 없이 내 생활기록부를 들여다 보셨다. 그때만큼 허무맹랑한 다짐이었다. 10년 뒤에 하와이에 오자고 했던 건.


그래도 10주년이니 하와이까지는 못 가더라도 반도는 벗어나 보자는 의미로 여행을 계획했다. 결혼기념일에 딱 맞출 수는 없어서 3월로 일정을 잡았다. 결혼기념 여행을 따로 잡기는 했어도 결혼 기념일 당일을 그냥 넘어가는 건 아쉬웠다. 하필 오늘따라 오후에 꽉 채워서 일정이 있어서 특별히 뭔가를 하기는 어려웠다.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나오거나 퇴근하고 집으로 가서 뭔가 시켜 먹으며 기념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전에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집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빵 가게에서 소금빵을 하나씩 사서 K와 먹었다. 열 시에 문을 여는 가게라 그 즈음 가면 여전히 따뜻한 소금빵을 먹는 게 가능하다. 어제도 점심을 먹고 소금빵을 하나씩 먹었다. 어제 아내와 K의 아내는 은근히 기대를 했다고 했다.


‘혹시 우리도 사다 주고 가는 거 아니야?’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오늘은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 있고, 근처까지 왔고, 게다가 결혼 기념일이기도 하니 소금빵을 배달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소금빵 두 개와 소보로빵 하나를 사서 집으로 갔다. 아내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어서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이들만 내가 들어온 걸 알고 반겼다. 작은방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아내에게 다가가 깜짝 놀라게 했다.


“워”


아내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돌렸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한바탕 운 얼굴이었다. 아니, 울고 있는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내가 청소기를 돌리는 건 비단 집의 청결 상태 개선이나 유지만을 위한 건 아니었을 거다. 마치 내가 헬스장에 가서 무아지경에 빠지며 일정 부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사연은 묻지도, 듣지도 못하고 빵만 전해주고 금방 나왔다. 저녁에는 그냥 퇴근하고 집에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내와 아이들이 나오는 건 어려워 보였다. 끝나는 시간이 정확한 것도 아니었고. 아이들은 먼저 저녁을 먹이겠다고 했고, 스파게티와 피자를 주문해서 먹였다고 했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미리 주문한 꽃을 찾는 일을 비롯해 몇 가지 일을 수행하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아이들은 저녁을 다 먹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K의 아내가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케이크를 주고 갔다고 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결혼 기념 축하 노래를 불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손수 제작한 편지봉투에 넣은 편지와 나름대로의 선물(창작 종이공예…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을 줬다.


‘으이그. 이런 거 백날 천날 써서 주지 말고 엄마 말이나 좀 더 잘 듣지’


가 진짜 속마음이었지만 당연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내가 아이들을 씻기는 동안 아내와 내가 먹을 저녁을 찾으러 나왔다. 아내가 먹고 싶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나눠서 시킨 터라 들러야 할 곳도 두 군데였다. 잠깐 은행도 들러야 했다. 마찬가지로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모두 안 자고 있었다. 시윤이는 짜증을 섞어서 울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보니 ‘엄마가 퍼즐을 그만하고 자러 들어가라고 해서’라고 했다.


‘편지를 아무리 써 봐야 말과 행동이 따라오지 않으면, 편지 쓴 게 아무 소용이 없다’

‘엄마를 진짜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으면 엄마 말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라’


등의 설교(?)를 시윤이에게 했다. 그 잠깐 사이에도 그렇게 짜증을 내다니. 평소에는 어떨지 상상이 가기도 하고 안 가기도 했다. 아이들을 눕히고 아내와 나의 결혼 기념 야식을 준비했다. 그때가 이미 아홉 시였다. 결혼 기념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아내도 나도 정신없이 허겁지겁 먹었다. 결혼이고 뭐고 일단 배가 너무 고팠다. 배를 좀 채우고 나니 지난 날을 추억하는 대화가 오갔다.


아내는 무척 피곤했다.


“여보. 기대가 있어서 더 실망했나 봐. ‘오늘은 말을 좀 더 잘 듣겠지?’라고 생각해서”


결혼의 열매인 자녀(정확히는 시윤이)에게 이토록 쓰린 하루를 선물 받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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