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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ul 24. 2023

엄마에게 아들이란

23.03.02(목)

아내와 아이들은 함께 처치홈스쿨을 하는 선생님 집에 놀러 간다고 했다. 점심시간 쯤 간다고 했고, 밥을 해서 가야 한다고 했다. 처치홈스쿨 하는 엄마 선생님과 자녀들이 모두 모이는 거라 꽤 많은 양을 해야 했다. 그래도 밥만 하면 되니까 크게 어려운 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촉박한 시간과 마음대로 따라 와 주지 않는 자녀들이 상황을 어렵게 만들 뿐.


점심에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잠시 집에 들렀다. 시윤이가 겨울 외투를 몇 개씩 겹쳐 입고 있었다. 시윤이는 나를 보고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특유의 귀여운(나에게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는 감정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꾹 참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시윤이가 또 뭔가 아내의 신경을 긁기 위한 행동을 하는 거였구나’


잠깐 옷만 갈아입으려고 들른 거라 바로 나왔다. 마음 속으로 아내와 시윤이의 건투를 빌면서. 아내와 아이들은 무사히 지인 선생님 집에 다녀왔다. 내가 아내와 아이들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오늘 괜찮았어?”

“어, 뭐. 크고 작은 일들은 있었지만”


크고 작은, 즉 평소에도 많이 겪을 법한 일들 정도만 있었다는 얘기였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하루를 보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을 눕히고 나서 아내는 갑자기 두통이 심해졌다고 했다.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일단 일찍 자라는 나의 닦달(?)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방으로 들어갔다. 운동을 갔다 왔을 때 아내는 안방에 있었다. 자는 건 아니었고 침대에서 그냥 쉬고 있었다고 했다. 아내 옆에 잠시 앉아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길 정도로 길어졌다. 그만큼 심각한 대화였고, 시윤이에 관한 얘기였다.


다른 날의 시윤이 이야기 하고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아내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낮에 꽤 진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아내는 다른 날과 다르게 시윤이를 향한 측은한 마음이 느껴졌다고 했다. 다른 날은 악다구니로 느껴졌던 시윤이의 외침이 오늘은 시윤이의 처절한 울분과 아픔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결론은 허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윤이를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자는 거였다. 시윤이는 아내와 나의 ‘둘째’가 아니라 ‘세 자녀 중에 한 명’일 뿐이다. 시기에 따라서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점유하는 자녀가 있을지는 몰라도(지금의 서윤이처럼) 영원하지는 않다. 시윤이도 지금의 서윤이처럼 살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내 일기에 시윤이를 어떻게 기록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걱정이 됐다. 나름대로 포장 지양, 사실주의 일기를 표방하다 보니 ‘아내와 시윤이의 시간’도 솔직하게 적었는데, 혹시나 나중에 시윤이가 보고 오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기에는 시윤이가 잠들고 나면 아내와 마주 앉아서 시윤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얼마나 애교가 많고 사랑스러운지, 뽀뽀할 때 내미는 도톰한 입술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아직 어설픈 구석이 많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시윤이가 엄마와 아빠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는 건, 기록하지 않으니까.


시윤이 덕분에 아내와 나의 엄마, 아빠로서의 태도와 방향을 꽤 무게감 있게 돌아보게 됐다. 아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 많았다. 당장 내일부터 시윤이를 향한 애정을 더 많이 드러내기로 했다. 아내가 시윤이를 향해 보내는 사랑은 물론이고 시윤이가 아내에게 보내는 여러 말과 행동을 조건 없이 다 받아주는 것까지 포함하는 거다.


“여보. 나 잘 할 수 있겠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내와 내가 공통으로 지금 시윤이에게 가장 필요한 거라고 느꼈기 때문에,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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