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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ul 28. 2023

그걸 끝까지 안 울고 읽다니

23.03.04(토)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오전에 처치홈스쿨 개강 예배가 있었다. 난 그 전에 새벽부터 축구를 하고 왔고. 아내는 이미 부지런히 아침의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아이들 아침을 먹인 아내는 조금 먼저 교회에 갔다. 나는 남은 준비를 책임지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에 맞춰서 갔다.


아내는 어제 엄청 늦게 잤다. 개강 예배 때 ‘자녀(소윤)에게 쓰는 편지’ 순서를 맡아서 그걸 어제 늦은 시간까지 썼다. 쓰는 건 물론이고 낭독까지 해야 했다. 소윤이도 ‘엄마에게 쓰는 편지’를 쓰고 읽어야 했다. 쓰는 건 했는데 읽는 건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막상 순서가 되면 하지 않을까 싶었다.


드디어 아내가 편지를 읽는 순서가 됐다. 아내가 첫 문장을 읽자마자 함께 예배를 드리던 엄마 선생님들이 모두 울기 시작했다. 정작 아내는 의외로 담담하게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꽤 긴 편지였다. 아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여보. 어떻게 그걸 끝까지 안 울고 읽어? 난 편지는 절대 못 읽어주겠다. 읽을 수가 없을 거야. 우느라”


아내의 편지 낭독이 끝나고 소윤이 차례가 됐다. 소윤이는 절대 못 읽겠다면서 몸을 꼬았다. 몇 번이나 읽어보라고 했지만 결국 소윤이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대신 아내가 읽었다. 난 아내와 나눈 이야기도 있고 해서 시윤이와 서윤이를 곁에 두고 특별히 시윤이를 챙겼다. 물론 시윤이가 크게 부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점심도 함께 먹었다. 가지밥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워낙 좋아하는 음식이다. 서윤이도 매우 바른 태도로 잘 먹었다. 설거지를 좀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왜. 내가 할게”

“아니야. 여보. 난 설거지가 즐거워”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리고 주방에서 나왔다. 자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놀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쓸 일은 없었다. 그래도 자녀들 곁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보다 마음 편히 아무 생각 없이 그릇을 닦는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텃밭을 보수했다. 교회 마당 한 편에 조그만 텃밭이 하나 있는데 그동안 제대로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그걸 이번 학기부터 처치홈스쿨에서 관리를 하기로 했다. 농사에 재능이 있거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관리가 잘 될 지 안 될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튼 일단 밭을 갈아 엎고 퇴비를 뿌려야 했다. 오랜만에 열심히 삽질을 했다. 자녀들은 텃밭 놀이를 빙자한 모래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린 자녀들은 낮잠을 잤다. 중고등학생들을 비롯해서 교회의 여러 사람이 모인, 매우 시끄러운 곳에서 과연 재우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결국 모두 잠들었다. 그것도 꽤 오래 잤다. 세 남매 중에는 서윤이만 잤다. 축구와 삽질의 결합 효과로 무거운 피로감에 시달리던 나도 잠시 눕고 싶었지만 너무 개방된 곳이라 참았다. 자는 서윤이를 볼 수 있는 곳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서윤이가 잠에서 깨고 나서는 한참 안고 있었다. 아마 시야에 아내가 들어왔으면 바로 갔을 텐데, 아내는 저 뒤쪽에 있었고 내가 서윤이 바로 옆에 있었다. 덕분에 아직 잠이 덜 깨서 움직임이 없고 내 몸에 축 늘어지듯 기대는 서윤이를 안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저녁도 교회에서 먹었다. 사실 저녁에 부흥회가 있어서 그때까지 교회에 있어야 했다. 집에 갔다 와도 됐지만 가는 것도, 다시 오는 것도 성가셨다. 딱히 할 건 없었기 때문에 여유로운 듯 지루한 듯 시간을 보냈다. 3층에 올라가서 잠깐 눈을 붙이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덕분에 예배가 시작되자 엄청난 졸음에 시달렸다. 서윤이가 계속 아내 무릎에 앉아 있겠다고 약간 떼를 썼는데 일부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고집과 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서윤이를 훈육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내 졸음을 떨쳐내는 데 서윤이를 활용(?)한 셈이기도 했다. 서윤이와 이야기를 마쳤는데도 일부러 서윤이를 안고 예배당 뒤쪽에 서 있었다. 언제 그렇게 무거워졌는지 이제는 오래 안고 있기 힘들어서 금방 자리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어제처럼 꽤 늦은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씻기고 눕혔다. 아내가 막바지 잘 준비에 한창일 때,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치킨 먹고 싶다. 치킨 쿠폰 없나?”

“없네. 애들 들여보내고 여보가 포장해 와요”


치킨이 먹고 싶은지는 오래됐다. 마침 오늘 점심에도 저녁에도 한 그릇 밥으로 먹었더니 뭔가 쾌락적인 야식이 먹고 싶었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치킨을 주문했다. 찾으러 가는 건 아내가 했다. 아내가 치킨을 사 가지고 돌아왔을 때 방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났다. 소윤이와 서윤이가 안 자는 듯했다. 얼마나 궁금할까 싶긴 했다. 밖에서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나가서 볼 수는 없고, 스멀스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약간’일 뿐이었다. 일단 치킨을 향한 나의 욕구가 너무 충만했다. 다른 사람 사정 봐 주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치킨을 먹었다(치킨은 언제나 맛있지만). 맛있게 먹으면 0 칼로리라더니 마치 그 체험을 하는 듯했다. 다 먹고 나서도 조금의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만족스러웠다.


“와, 여보. 너무 만족스럽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잘 거야”


며칠 동안 계속 바빠서 집을 제대로 못 치웠더니 집은 난장판이었다. 아내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일로 미뤘다. 오늘은 야식의 쾌락에 집중하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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