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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ul 28. 2023

해열제를 보류할 담력의 상실

23.03.05(주일)

“아빠. 아홉 시예여”

“어? 벌써?”


소윤이가 아내와 나를 깨웠다.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하지만 오히려 알람을 안 맞춘다. 자녀들이 알람보다 빠르게 일어나서 아내와 나를 깨우는 게 보통의 일상이었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은 요즘은 의외로 늦잠을 자게 될 때도 많다. 오늘처럼. 게으름을 피운 건 아내와 나였는데 언제나 그 대가를 치르는 건 자녀들이다.


“소윤아, 시윤아, 서윤아. 오늘은 시간 없으니까 아침 진짜 부지런히 먹어야 돼”


자주 얘기하지만, 오늘’은’이 아니라 오늘’도’가 더 정확한 표현일 거라고 생각한다. 여유롭고 한가로웠던 아침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그 무언가에 가깝다. 고맙게도 자녀들은 엄마와 아빠의 채근을 기꺼이 받아줬다. 밥도 부지런히 먹었다. 사실 소윤이나 시윤이는 평소에도 부지런히 먹는다.


서윤이는 오늘도 앞에서 찬양하는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서성거렸다. 아예 작정하고 울먹거렸다. 오늘은 아동부 예배가 따로 없어서 소윤이와 시윤이도 함께 예배를 드렸다. 언니와 오빠 사이에 앉아서 드리라고 해도 한참을 아내 옆에 붙어 있었다. 말없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빨았다. 겨우 설득해서 소윤이와 시윤이 사이에 앉혔다. 아내는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앞에 서서 찬양을 했다.


대신 서윤이는 예배 시간에 고집을 좀 많이 부렸다. 아내 무릎 위에 앉겠다는 거였다. 나에게 강력한 간식거리가 있는 게 아니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나보다는 아내를 더 원한다. 장소와 상황을 불문하고. 예배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서윤이의 무게도 만만하지 않아서 오랜 시간 앉혀 놓으면 부하가 걸린다. 힘겨워 하는 아내를 위해 서윤이를 내 무릎 위로 옮겼는데 엄마에게 가겠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두어 번 예배당 밖으로 안고 나갔다 왔다. 결국에는 내 무릎에 앉기는 했다.


오늘은 좀 한가했다.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교회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기도 했다. 예배 시간에 잠들었다가 깬 서윤이에게 밥도 먹였다. 그러다 처치홈스쿨을 함께 하는 지인네 식구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마침 지인네 둘째가 낮잠을 잘 시간이었다. 아내는 집에 들러서 그림을 그릴 도구를 챙겼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그리고 지인네 첫째의 의자 체류 시간을 확보할 중요한 수단이었다.


일단 먹을 것으로 시간을 벌려고 했는데, 양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네 명의 자녀는 놀라운 기세로 빵을 먹어치웠다. ‘시간을 번다’라는 게 의미가 없었다. 아내가 챙긴 스케치북과 색연필이 참 요긴했다. 감사하게도 자녀들은 그림 그리기에 열중해 줬다. 덕분에 어른들도 비교적 차분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림 하나를 그릴 때마다


“엄마(아빠). 여기 봐요. 제가 이거 그렸어요”


라고 외치며 엄마, 아빠에게 말을 걸어서 대화가 뚝뚝 끊기기는 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대왕암에 산책도 가자고 했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우리가 가족끼리 가는 거라면 몰라도 지인네 어린 자녀들과 함께 가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또 많이 걸어야 하는 곳이었고. 게다가 집도 난장판이었다. 오늘은 작정을 하고 치워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몇 번이나 계속 물어봤다. 특히 소윤이는 매우 좋지 않은 태도와 함께.


집으로 와서 부지런히 집안일을 했다.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여러 짐과 옷도 치우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나름대로 역할에 충실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담당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공부방을 위주로 치웠다. 다섯 식구(서윤이는 제외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가 힘을 합치니 생각보다 금방 깔끔해졌다. 농경사회에서 자녀가 재산이었던 이유가 이런 거다.


저녁은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갑작스럽게 제안을 했다.


“저녁 먹고 산책하러 나갈까?”

“네!”


소윤이와 시윤이는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목소리로, 즉시 대답했다. 아내의 의견은 미리 묻지 않았지만 오늘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바닷가를 걸었다. 서윤이도 유모차에 태우지 않고 걷게 했다. 해변을 걷다 보니 달고나를 파는 점포가 보였다. 소윤이는 가방, 정확히 말하면 가방 안에 있는 지갑을 챙겨서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잊지 않고 챙겼을 거다.


“아빠. 저 뽑기 하고 싶어여”

“해. 소윤이 용돈으로”


한 판에 삼 천 원이었다. 시윤이는 용돈이 없었다. 정기적으로 받는 용돈도 없었고 가끔 받는 특별 용돈도 없었다.


“시윤아. 그럼 시윤이는 아빠가 내 줄게. 시윤이도 같이 해”


그러자 아내가, 그럼 소윤이가 너무 아쉬울 거라고 했다.


“아빠. 그럼 저는 아빠가 조금만 보태주세여”

“그래. 그럼 소윤이는 천 원만 내”


소윤이와 시윤이는 나란히 앉아서 설탕을 불에 녹이며 젓가락으로 저었다. 소윤이는 사장님에게 특별 주문을 했다. 지난 번에 시윤이가 동생이라고 시윤이 뽑기를 더 꾹 눌러주셨고, 결국 시윤이만 모양대로 뽑아내는 걸 성공했다. 이번에는 자기도 꽉 눌러달라는 거였다. 사장님은 엄청 꾹 눌러주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바늘로 콕콕 찌르면서 열중했는데, 둘 다 갑자기 툭 분리되면서 성공했다. 사장님은 미리 만들어 두신 달고나를 하나씩 더 주셨다.


달고나를 먹으며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아내에게 커피 쿠폰이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려고 들어갔는데 앞에 밀린 주문이 많았는지 15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난 아이들을 데리고 옆에 있는 게임장에 갔다. 거기도 소윤이가 가고 싶어 했다. 무슨 낚시하는 게임이 있었는데 그걸 했다. 소윤이는 자기 용돈으로 시윤이도 시켜줬다.


그러고 나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걸었다. 시윤이가 조금 피곤해 보였다. 힘들다는 말도 많이 했다. 유모차에 타고 싶다고도 했는데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꽤 진심도 느껴졌다. 아무튼 많이 졸려 보였다. 그렇게 집에 왔는데 시윤이가 이상했다. 그냥 졸린 게 아니었다. 열이 났다. 급격하게 기운도 없어졌다.


“시윤아. 많이 힘들어?”

“네”


집에 올 때 힘들다고 한 게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 걸을 힘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꾸역꾸역 걸었나 보다. 안쓰럽고 미안했다. 엄청 힘들어 했다. 속이 안 좋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기운이 없다고 했다. 목이 아프다고 했고. 열은 꽤 많이 났다. 산책을 괜히 했나 싶었다. 일단 해열제를 먹였다. 39도가 넘었기 때문에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작년 초 서윤이 일을 겪기 전에는 높은 고열에도 안 먹일 때도 많았는데, 그 일 이후로는 그런 담력이 사라졌다. 서윤이가 열로 경련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누군가 열이 나면 항상 상상의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열이 많이 나는 것치고는 엄청 많이 힘들어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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