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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Nov 27. 2023

기다린 만큼 순식간에

23.03.08(수)

모든 식구가 안방에서 잤다. 어제 잠에서 깬 소윤이가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아내가 안방으로 데리고 왔다. 매일 안방으로 오는 서윤이도 당연히 왔고, 몸이 아픈 시윤이도 왔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한 방에서 잤다. 시윤이는 많이 괜찮아졌다. 스스로도 괜찮다고 했고, 겉으로 보기에도 괜찮아 보였다. 열은 여전히 조금 났지만,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소윤아. 생일 축하해. 행복한 하루 보내”


출근하면서 소윤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참 전부터 ‘얼른 생일이 왔으면 좋겠다’라며 기대했다. 사실 생일이어도 막상 특별한 일이 막 생기는 건 아니다. 저녁에 가족끼리 조금은 특별하게 기분을 내며 밥을 먹고 생일 축하를 하는 정도가, 평소와 다른 일상이다. 그래도 좋은가 보다. 하루 종일 왠지 모를 설렘을 안고 살 수 있어서 그런가.


“여보는 괜찮나요?”


난 아내가 걱정이었다. 여러 모로. 소윤이 생일을 위해 꽤 거창한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미역국, 월남쌈, 쌀국수, 잡채, 수육이었다. 이렇게 보면 다섯 가지(다섯 가지로도 충분히 많지만)인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월남쌈이 그랬다. 야채를 다 채 썰어야 하고 오리고기도 볶아야 하고. 그러니 아내가 걱정이었다. 딸의 생일을 준비해야 하니 ‘난 잠시 육아에서 빠질게’라고 말하고 육아와 가사에서 탈출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안부를 묻는 나의 질문에, 아내는 한 시간 쯤 지나고 답장을 보냈다.


“시윤이 진짜 나아가나 봐요. 평소의 모습이”


평소의 모습이라는 건 ‘아내와 내가 다 받아주기로 한’ 바로 그 모습을 말하는 거였다. 아프지 않은 건 좋은 일인데 마냥 좋아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좋은 건가. 무한 수용…응원합니다”


그나마 아내가 다 내려놓고 받아주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다행이었다. 마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아내를 응원했다.


“소윤이가 미역국은 내일 끓여달래요”


소윤이는 아내가 하려고 하는 음식을 듣더니 그렇게 얘기했다고 했다. 밥과 미역국은 꼭 없어도 될 것 같다고 하면서. 소윤이 다웠다. 요즘 많이 쓰는 표현은 아닌 것 같지만 ‘쿨하다’. 이런 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퇴근하면서 꽃 가게에 들러서 꽃 두 송이를 샀다. 한 송이는 소윤이, 한 송이는 아내. 사실 아내가 박수를 받아야 하는 날이다. 나오는 녀석도 고생이었겠지만 나오게 하는 아내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태어난 날이니 축하를 받아 마땅하지만, 낳아준 엄마에게 감사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내 엄마가 들으면 콧방귀를 뀌실지도 모르지만). 최소한의 감사 표현이 꽃 한 송이였다. 아직은 자녀들이 어리니 내가 대신 감사를 표현해야 했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샀다. 선물 받은 기프티콘이 있어서 그걸 사용했다. 기분도 내고, 소윤이도 좋아할 만한 최적의 선택이었다.


퇴근하는 길에 K의 아내와 자녀들을 만났다. 우리 집에 선물을 갖다 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함께 집으로 갔다. 아내가 엄청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가해 보였다. 대부분의 준비를 거의 끝낸 상황이었다. 그만큼 아내의 낮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갔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둘러앉아서 놀기 시작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K의 식구들도 저녁을 먹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다 함께 먹을 만한 양이 되는지는 몰랐다. 아내에게 물어 보기도 하고 의견도 들어야 했다.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00야. 그럼 아예 같이 저녁 먹고 갈래?”


K도 집으로 왔다. 소윤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생일에 더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니까 좋고 말고 할 것 없이, 당장 K의 자녀와 놀 시간이 더 늘어났다는 게 좋았을 거다.


생일상을 모두 차리고,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놓고 일단 축하 의식부터 거행했다. K의 자녀들이 준비한 선물을 비롯한 이곳저곳에서 받은 선물도 함께 놓고 사진을 찍었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 쌓여서 축하를 받는 게 보기 좋기는 했다(그래 봐야 K네 식구였지만, 그래도 자녀가 세 명이라 시윤이와 서윤이까지 가세하니 제법 풍성해 보였다).


생일이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K의 자녀들도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됐고. 소윤이는 흥분했다. 평소에도 K의 자녀를 만나면 많이 들뜨기는 한다. 거기에 생일이기까지 했으니 오죽했을까. 생일이 아니었으면 바로 훈육을 했을 만한 상황도 많았다. 1년에 딱 하루니까, 소윤이의 일탈을 기꺼이 눈 감아 줬다.


밥을 다 먹고 받은 선물을 하나씩 풀어봤는데 이때도 소윤이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하고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소윤이의 표정을 비롯한 반응은 매우 차분했다. 소윤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오해할 정도로. 아내와 나는 알았다. 얼마나 만족하고 있었는지. 받은 선물들이, 평소 소윤이의 취향에 딱 맞는 것들이었다.


“소윤아. 좋아하는 거 맞지?”

“네. 좋아여”


K의 아내도 소윤이에게 물어봤다. 선물 받고 좋아서 길길이 날뛰는 건 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선물을 잃어버리거나 그러면 펑펑 울 정도로 좋아하면서. 자녀들은 아이스크림 케이크도 나눠 먹었다. 물론 엄마들이 정한 할당량만큼만. 그래도 행복해 했다. 평소에는 잘 주지 않으니까.


K네 식구는 갔고 축제는 끝났다. 잘 준비를 시작했다. 원래 우리 가족끼리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려고 했는데 그것도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육아 퇴근을 향해 달렸다. 너무나 사랑하는 첫째 딸의 생일에도, 퇴근은 해야 한다.


“엄마. 오늘이 안 지나갔으면 좋겠어여”


소윤이가 침대에 누워서 말했다. 좋기는 엄청 좋았나 보다. 장식은 그대로 두고 내일이라도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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