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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Nov 27. 2023

시든 남편과 활짝 핀 아내

23.03.08(수)

아침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시윤이와 서윤이가 먼저 깼는데 서윤이가 조금 시끄럽게 하니까 시윤이가 서윤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엄청 짜증을 낸다는 거였다. 서윤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이유는 ‘누나가 깰까 봐’였다. 누나가 깨면 왜 안 되냐고 물어봤더니 누나 몰래 뭔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뭘 몰래 하는지는 비밀이라서 알려주지 않겠다고 했고. 아내는 감정의 동요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그냥 전화를 한 거라고 했다. 난 시윤이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서윤이가 떠들지 않아도 어차피 누나가 깰 시간이 다 됐으니 차라리 누나가 곧 깰 거라고 마음 먹고 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뭘 하려는 건지 모르지만 누나가 깨기 전에 잠깐이라도 하든가 아예 다음에 시간이 많을 때 하는 게 어떻겠냐고. 시윤이는 마지못해 그럼 나중에 하겠다고 했다. 목소리에 잔뜩 ‘뾰로통’이 묻어 있었다.


“입이 나와서 방으로 들어갔네”


뭘 하려고 했던 건지는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수요예배를 드리고 점심도 먹는다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이번 학기 개강하고 첫 시간이라 엄마 선생님들끼리 기도회도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퇴근할 무렵에 걸려온 아내의 전화 목소리가 매우 힘이 없었다. 아내는 저녁으로 뭘 준비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아내는 저녁에 성경공부 모임도 있었다. 아내에게 집 근처에 있는 중국음식점에 가서 먹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난 집이든 밖이든 무엇을 먹든 크게 상관없었다. 최대한 아내가 편한 방법으로 결정하길 바랐다. 아내는 중국음식점에 가서 먹는 걸 선택했다. 정작 본인은 별로 밥 생각이 없다고 했다.


“여보. 그럼 여보는 그냥 집에 있다가 제자반 가. 내가 애들 데리고 저녁 먹을게”

“어? 아니야. 같이 가. 여보 너무 힘들잖아”

“괜찮아. 어차피 먹지도 않는데 뭐 하러 가. 집에서 쉬다가 일찍 가”

“여보는 안 힘들어?”

“어, 괜찮아”


집에서 나오기 전에 생일축하 장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면 당일에 찍지 않은 건 크게 의미가 없을 거다. 남겼다는 게 중요하니까. 아내는 집에 두고 세 남매만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걸어서 3분이면 가는 곳이었는데, 시윤이는 나오자마자 넘어졌다. 유모차를 바퀴에 발이 걸려서 넘어졌는데 하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서 얼굴로 떨어졌다. 엄청 세게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아프긴 했을 거다. 엄청 울었다. 코가 빨개졌다. 다행히 금방 진정됐고.


의외로 엄청 정신이 없고 그러지는 않았다. 애초에 각오를 하고 포기를 해서 그런가. 세 녀석 모두 잘 먹었다. 난 아이들의 속도를 보며 내 양을 조절했다. 하나 더 시켜서 배불리 먹으면 되긴 하지만 별로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냥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적당히 먹고 싶었다. 먹고 있는데 아내가 잠시 들렀다. 교회에 가는 길에 얼굴을 보러 왔다고 했다. 그래도 잠시 쉼표를 찍고 교회에 가는 아내를 보니 식당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소화도 시킬 겸 아주 간단하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한 15분 정도 걸었나 보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모두 엄청 뛰었다. 아마 더 걷자고 했으면 얼마든지 더 걸었을 테지만, 내가 힘들었다. 걷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아직 근무 중인 게 힘들었다. 얼른 퇴근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은 스스로 씻게 하고 잠시 소파에 앉았는데 역시나 엄청 피곤했다. 잠깐 옆으로 누웠는데 바로 잠들었다가 깼다.


“아빠. 아빠 방금 코 골았다여”

“아 그랬어?”


간신히 눈꺼풀을 올리고 몸도 일으켰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알아서 씻었으니 서윤이만 씻겼다. 엄청 빠르게. 다른 말로 하면, 대충.


“아빠. 서윤이 벌써 다 씻었어여?”

“어”

“엄청 빨리 씻었네”


아내는 엄청 늦게 왔다. 열 한 시가 넘어서 왔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나서도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늦었다고 했다. 늦었지만,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막 이슬을 맞은 풀잎처럼 푸르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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