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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Nov 28. 2023

품격은 부지런함에서

23.03.12(주일)

소윤이가 자기 전에 물어봤다.


“아빠. 내일 일곱 시 반에 깨울까여?”

“아니야. 소윤이는 엄마, 아빠 깨울 생각하지 말고 더 잘 생각을 해야지”

“그래도 혹시 일어나면 누구 깨울까여?”

“글쎄”


청소를 하러 나가야 하는 시간이 일곱 시 반이었다. 소윤이는 자기가 그 시간에 깨어 있을 때가 많으니 아내나 나를 깨워주겠다는 거였다. 알람을 맞추기는 하지만 사람만큼 확실한 알람이 없기는 하다. 역시나 오늘 아침에도 소윤이는 시간에 맞춰 안방으로 왔다. 알람 소리에 이미 잠을 깨서 일어나려고 하던 참이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아침부터 많은 걸 했다. 일단 세 녀석 모두 샤워를 했다. 애들 씻기는 건 아내가 담당했고 난 주방 정리를 했다. 설거지를 좀 미뤄서 꽤 보기 싫은 상태였는데 말끔하게 치웠다. 씻고 나온 아이들 머리도 말려 주고 옷도 입혔는데, 시간이 남았다. 부지런함은 여유를 만들고 여유는 품격을 만드는 것인가. 아이들을 재촉할 일이 없으니 유난히 더 평화롭게 느껴졌다.


서윤이에게는 주의 아닌 주의를 줬다.


“서윤아. 오늘은 엄마 찬양할 때 앞으로 나오거나 엄마 계속 부르면 안 돼. 알았지? 서윤이 자리에 앉아서 엄마 찬양하는 거 보고 같이 찬양하면 돼. 알았지?”

“네”

“혼자 앉아 있는 거 싫으면 언니, 오빠 따라서 아동부 예배 가면 되고”

“네”

“연습할 때는 엄마 옆에 있어도 되는데 예배 시작하면 자리에 앉아 있어야 돼. 알았지?”

“네”


생각만으로도 슬펐나 보다. 약간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오늘도 아내는 끝까지 부르는 게 어려울 것 같았다.


연습을 시작했고 서윤이는 앞쪽 자리에 앉았다. 서윤이는 찬양을 엄청 열심히 따라 불렀다. 마치 프로 성악가가 발음 하나 하나를 정확히 내기 위해서 입술은 물론이고 안면의 모든 근육을 다 쓰는 것처럼, 그렇게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찬양을 따라 불렀다. 표정으로 흉내만 내는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가사도 외웠고 성량도 풍부했다. 아내와 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당장 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연습이 끝나고 잠깐 쉴 때, 아내는 서윤이에게 가서 칭찬해 주고 안아줬다. 난 앉은 자리에서 두 손의 엄지를 들어 올렸다. 서윤이는 환하게 웃었다. 뭘 칭찬받고 있는 건지 알았을 거다. 아니, 칭찬이 아니었다. 그냥 숨만 쉬어도 박수를 받는 자녀가 숨 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때 느껴지는 사랑스러움이었다. 정작 예배를 시작할 때가 되니까 혼자 앉아 있기 싫다고 하면서 아내 손을 놓지 않기도 했지만, 결국 아내가 잘 설득했다. 막상 예배 시간에는 손을 빠느라 그런 건지, 연습 때보다 기분이 울적해서 그런 건지 연습 때만큼 열심히 부르지는 않았다.


아내는 점심을 준비해야 해서 예배 시간 중간에 식당으로 내려갔다. 서윤이는 예배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고 서윤이와 함께 식당으로 내려갔다. 점심은 카레였다. 내 것과 서윤이 것을 한 그릇씩 떠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먹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윤이에게 먹으라고 하면 여기저기 카레의 흔적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도 되긴 하지만,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서윤아. 아빠가 먹여줄게”


덕분에 생각보다 정신이 없었다.


서윤이는 오후 예배 시간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시윤이도 엄청 졸려 보였다. 아마 교회가 아니고 집이었으면 한 숨 잤을지도 모르겠다. 예배 시간에 자는 건 ‘너무 아기처럼 보일까 봐’ 싫어하는 시윤이는, 끝까지 버텼다. 아내가 안아주기도 하고 거의 잠들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아내와 나는 잠깐이라도 눈을 좀 붙이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소윤이는 잠도 없고 버티는 능력(?)도 출중한 데 비해 시윤이는 사실 잠이 많다. 아내와 내가 파악하기로는 그렇다. 다만, 잠이 없는 누나를 따라가려고 하다 보니 요즘은 체력이 부치는 것 같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는 덜 졸려 보였다. 하긴 나도 비슷하지 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아니었으면 어딘가에 가서 바람을 쐬고 산책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비가 오니 드라이브도 산책도 의미가 없었다. 서윤이가 낮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카페에 가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한 선택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서윤이 낮잠 카드는 이미 쓴 뒤였다. 바로 집으로 왔다.


“소윤아. 소윤이가 보고 싶다고 한 영상이 뭐가 있었지?”


시간이 제법 남아 있어서 오랜만에 영상을 보여줄까 싶었다. 팝콘도 만들어서 주고. 내가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자기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하면서 신기해 했다. 부부의 연으로 10년을 채웠으니 마음의 정이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련의 경향성을 띠는 육아인들의 사고체계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너무 길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내용의 영화를 보여줄까 싶었지만, 아내와 나에게 정보가 너무 없었다. 뭘 보여줘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먼저 얘기를 했다.


“아빠. 그거 뭐져. 동물 나오는 거?”

“우리의 지구?”

“네. 그것도 좋아여”


자주 본 건데 또 봐도 좋다고 했다. 혹시 몰라서 ‘동물의 왕국’으로 검색을 해 봤더니 많은 영상이 나왔다. 한국말로 더빙까지 되어 있어서 더 좋았다. 일단 저녁부터 먹기로 했다. 아내가 쓰고 남은 다진 채소가 있었다. 그걸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아내와 내가 먹을 만큼 밥이 많지는 않아서 고민을 하다가 비빔면에 소면을 더 삶아서 먹었다. 지난 번 소윤이 생일에 남은 채 썬 채소를 넣으니 꽤 수준이 높아졌다.


영상은 50분 정도였다. 영상 틀어주고 팝콘 만들어서 주고 주방 정리를 했더니 금방 50분이 지났다. 아이들 영상 보는 사이에 방에서 잠깐 운동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영상을 보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얘들아. 이제 씻어. 오늘 아침에 엄마가 씻겨줬으니까 밤에는 너네가 좀 씻어도 되지?”


아내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


아이들을 눕히고 나서 아내는 바쁘게 움직였다. 지난 수요일에 이번 학기의 첫 일정이 시작되긴 했지만, 정식 수업은 내일이 처음이었다. 엄마와 선생님의 역할을 동시에 다발적으로 감당해야 하니 은근히 챙길 것도 많고 바쁘다. 마음의 부담도 좀 있는 듯했다. 집에 있는 건 그 나름대로 힘들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시간과 일정에 맞춰서 뭔가를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인 듯했다. 아내는 내일 예배 인도를 맡아서 그걸 준비하는 데 시간을 한참 썼다. 뭐든 열심히, 성의껏 하는 건 아내의 큰 장점이다. 나에게는 없는. 예배 준비를 마치고 나서는 미리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놨다. 이불, 숟가락, 옷, 책, 가방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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