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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Nov 29. 2023

얼른 나가, 어차피 나갈 건데

23.03.15(수)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했다. 아내부터 서윤이까지. 한 명씩 뽀뽀를 나누면서. 기분 좋게 출근한 지 30분도 안 돼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에게 전화가 오면 가끔씩 통화를 하기도 전부터 심장이 ‘철렁’ 할 때가 있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종종.


“여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전화했어”


내가 보기에 아내는 엄청 노력하고 있다. 진심을 다해서. 철원에서 군생활 할 때 눈이 참 많이 내렸다. ‘쓸고 돌아서면 그대로 쌓여 있는’ 눈을 실제로 자주 봤다. 열심히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열심히 쓸어내는데, 정말 돌아서면 다시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그때의 막막함과 허망함이란.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 더 많이 쌓일 테고 언젠가는 치워야 하니까. 감히 비유하자면 아내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뭐라도 얘기해 줄 사람이 필요했어”


난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라고 아내에게 제안했고, 아내는 조금의 고민이나 생각 없이 그대로 수용했다. 일단 해 보겠다고 했다. 아내의 말처럼 누군가 뭐라도 제시해 주면 일단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 뒤로 걱정이 되서 메시지를 두 번 정도 보냈는데 답장은 없었다. 수요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야 해서 바빴을 거다. 잘 헤쳐 나왔는지 궁금했다. 첫 일정에 관한 약간의 부담과 스트레스, 아내를 향한 걱정과 염려 덕분에 마음이 차분해지지 않았다. 성경으로 마음을 좀 다스려 보려고 했는데, 하필 왕의 족보만 쭉 나오는 부분을 읽을 차례였다.


아내와 자녀들은 수요예배를 드리고 계속 교회에 있었다. 처치홈스쿨의 다른 엄마 선생님들과 자녀들도 함께였다. 중간에 잠깐 통화를 했는데 다행히 평이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평이한’은 다른 날처럼 ‘다소 지친듯 하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정도의 수준은 아닌’ 이었다.


난 다른 곳에서 일을 하다가 마지막에 잠시 교회에 들렀다. 할 일이 있었다. 아내와 자녀들은 집에 가려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잠깐 얼굴을 비추고 2층으로 올라왔다. 아내와 자녀들은 집에 가기 전에 잠깐 올라와서 인사를 했다. 나도 교회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30-40분 정도 더 있다가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면서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오늘 제자반 하나요?”

“네. 합니다”

“여보. 오늘도 일찍 나가요. 저녁 따로 먹어도 되고”

“오잉”


‘오잉’은 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미안하고 민망하니, 반갑다는 표현도 적절히 하면서 거절할 의사는 없다는 걸 드러내는 답이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한부 자유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주고 싶었다. 내가 주는 건 아니지만. 퇴근하자마자 아내를 채근했다.


“여보. 나갈 거면 얼른 나가. 밥도 그냥 나가서 먹어”


아이들 저녁은 아내가 추천했다. 시윤이가 ‘조랭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조랭이떡을 사 놨다고 했다. 아이들 저녁으로는 ‘조랭이 떡볶이’를 하기로 했다. 내 저녁이 남았는데 그것도 아내가 추천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늘 점심에, 어제 먹고 남은 찜닭을 가지고 가서 비벼 먹었다고 했다. 아내는 오늘 점심을 못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다퉈서 그걸 처리(?)하느라 못 먹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소윤이 이야기를 들어 보니 훨씬 더 깊은 ‘속상함’이 폭발했던 것 같았다. 아무튼 아내는 먹지 못한 점심을 저녁에 먹으려고 싸 왔다. 유리 밀폐용기에 밥과 찜닭, 계란 프라이를 넣어서 왔다.


“여보. 이거 내가 먹으려고 싸 올 때는 괜찮았는데 여보 먹으라고 주려고 하니까 좀 그렇네”

“뭐 어때. 괜찮아. 상관없어”

“그래도. 좀 그렇네”

“괜찮다니까”


다소 ‘개밥’처럼 보이기는 했다. 사람의 식사라고 하기에는 개밥으로 오해 받을 만 했고 개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품질이었다. 아이들은 조랭이 떡볶이를 먹고 난 순무김치 하나를 꺼내서 개밥 아니 닭밥 아니 사람밥을 먹었다. 맛있었다. 떡볶이도 너무 맛있게 돼서 뿌듯했다. 자녀들의 평가도 아주 좋았다.


아내는 우리가 저녁을 먹기 전에 이미 나갔다. 아내에게 ‘쌀국수’를 추천했다. 어제 점심에 먹은 곳이 맛도 그럭저럭 괜찮았고 가격도 적당했다. 혼자 먹기에도 좋을 것 같았고. 아내도 찾아보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하면서 거기서 먹겠다고 했다. 나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난 길을 잃었어?”

“왜?”

“여기 오후 세 시까지만 한다네”

“아, 그래?”


그제야 생각이 났다. 가게 벽에 붙어 있었다.


‘사정이 생겨 한동안 평일에는 11시-3시, 주말에는 11시-9시까지 합니다’


여보, 미안. 알았는데 몰랐네.


잘 준비를 마친 소윤이가 책을 읽어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지도 않았고 엄청 힘들지도 않았다. 주방을 모두 치우고 소파에 앉았다. 소윤이가 고른 책은 ‘장발장’이었다. 그냥 일반 책이었다. 그림은 없고 글밥은 많은. 그래도 별로 졸리지 않아서 한 챕터는 다 읽어 주려고 했다. 막상 읽다 보니 반도 못 읽었을 때부터 헛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 아빠 뭐라구여?”


몇 번을 그랬다.


“소윤아. 안 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읽자”


소윤이와 시윤이도 이럴 때는 전혀 불평이 없다. 아마도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싶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한 눈에 보기에도 어제보다는 훨씬 힘도 넘치고 밝아 보였다. 아내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제, 어제보다는 훨씬 낫다고 했다. 그제, 어제는 제대로 얘기도 못했는데 오늘은 꽤 한참 동안 오늘 있었던 여러 일을 비롯한 다양한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다 낫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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