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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01. 2023

제주도 여행 3일차

23.03.24(금)

어제 아침과 비슷했다. 아이들이 먼저 깨서 할 일을 다 마친 뒤 놀고 있었고, 아내는 일어나기 힘들어 했다. 오늘 아침은 토스트였다. 숙소에 토스트기가 있어서 어제 미리 식빵을 사 놨다. 계란 프라이도 해 줄까 하다가 그냥 잼만 발라서 줬다. 귀찮았다. 엄청 잘 먹었다. 아내가 먹을 것도 좀 넉넉히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워낙 잘 먹어서 딱히 많이 남지도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니 오전은 그냥 훅 지나갔다. 애들 아침 먹이고 잠깐 쉬면 금방 점심시간이었다. 오늘은 갈 곳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고깃집이었다. 지인이 추천해 준 돼지생갈비 가게였다.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왔을 때도 꼭 가 보고 싶었는데 못 가서, 이번에는 기필코 가겠다고 각오(?)를 하고 왔다. 점심시간에 문을 여는 곳이었는데 문을 열기 전에 이미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사진도 찍고 놀면서 기다리니 곧 문이 열렸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비가 왔다.


여행 내내 맑은 하늘 한 번을 못 본 슬픔을 보상받기에 충분한 황홀한 맛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가 잘 먹는 거야 당연하고 아내도 잘 먹었다. 나는 말 할 것도 없고. 아이들과 식당에 가서 고기를 먹은 것도 오랜만이었지만 아이들과 식당에 가서 배부르게 고기를 먹은 건 더더욱 오랜만이었다. 본능적으로 아이들의 기세와 속도를 살피며 먹긴 했지만 어쨌든 나도 아주 맛있게, 충분히 먹었다. 우리가 다 먹어갈 때 쯤에 뒷자리에 남자 혼자 들어와서 앉았다. 일행은 나중에 들어오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혼자였다. 혼자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 남자를 보니 ‘제주도라면 혼자 먹는 것도 너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 너무 즐겁고 좋은데, 자꾸 혼자 혹은 아내와 둘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왜일까.


오늘의 외출은 정말 오로지 ‘고깃집’이 목적이었다. 그 이후의 일정은 아무것도 예정된 게 없었다. 급히 고깃집 근처의 갈 만한 곳을 찾다 보니 유채꽃을 보기도 좋고 산책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흐린 정도가 아니라 언제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긴 했지만 일단 갔다. 언제 어디서 비가 내릴지 모르니 아이들 우비와 장화를 모두 챙겨서 나왔다.


생각만큼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보자마자 감탄이 나오는 곳도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걸을 만한 곳이었다. 그래도 노란 유채꽃이 꽤 가득했다. 기분 좋게 걷는데, 보슬보슬 견딜 만한 수준이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아이들은 우비를 입었고 아내와 나는 우산을 폈다.


“이것도 다 추억이야”

“그래. 비 와도 운치 있네”


사실, 운치의 수준을 넘어선 수준이긴 했다. ‘우리의 여행은 고난으로 점철되지 않았다’라는 강력한 자기세뇌가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정말 다 추억이 되는 건 맞지만 그래도 고르라면 ‘맑고 화창한’ 날씨를 고를 거다. 선택의 권한이 없는 게 슬플 뿐이었다. 그 와중에 사진은 열심히 찍었다. 이럴수록 남는 건 사진과 기억 뿐이니까.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비를 맞고 싶은 욕구가 충만하다.


더 이상 머물기 어려울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져서 서둘러 차로 돌아왔다. 아내는 몸의 오른쪽이 흠뻑 젖었고, 난 겉옷이 축축했다. 아주 오래 전에 교회 수련회에 가서 비를 맞으며 천로역정 같은 프로그램을 했던 때의 느낌과 유사했다. 뭔가 고되고 안락한 곳에 가고 싶고. 이번 여행에 ‘산책’, ‘야외’, ‘환상적인 날씨’ 이 따위 것들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라고 마음을 먹었다.


카페에 갔다. 아내가 미리 찾아 놓은 곳이었다. 여기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평소 마시는 커피에 비하면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지불하는 게 아깝지 않은 경험이었다. 내가 마시는 커피가 어떤 원두로, 어떤 방법으로 추출했고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를 매우 자세히, 마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처럼 친절하고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신이 마시고 있는 커피는 무척 질이 좋습니다’였다.


“여보. 근데 약간 가스라이팅 같기도 하고”

“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난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 만족스러움의 아주 큰 요인이 또 있었다. 서윤이가 한참 잤다. 고깃집에 갈 때 잠들려고 하는 걸 막 깨웠다.


“서윤아, 밥 먹고 자야지”


라고 얘기는 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서윤아. 이따 카페에 갈 때 자라’였다. 바람대로 이뤄졌다.


커피를 어느 정도 마시다 보니 난 졸음이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았다. 아내는 소윤이, 시윤이와 끝말잇기를 했는데 그걸 한 시간을 했다. 나도 중간에 깨서 소윤이와 시윤이를 도와줬다. 시윤이가 끝말잇기가 가능한 게 신기했다. 끝말잇기가 안 돼서 ‘깍두기’로 껴 줬던 게 얼마 전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커서 끝말잇기를 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참여하는 수준을 넘어서 구사하는 어휘도 놀라웠다. ‘아, 시윤이도 이런 말을 아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단어를 말 할 때가 제법 많았다. 아내와 내가 놀랄 때도 많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수제버거 가게에 들렀다. 제주도에 올 때마다 자주 먹었던 곳이었다. 올 때마다 먹는 아내와 나도 신기했지만 꽤 오랜 시간 영업을 유지하는 것도 신기했다. 아내와 나는 수제버거를 먹었고 아이들은 어제 먹고 남은 고기와 야채를 넣고 볶음밥을 만들어서 줬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또 목욕을 했다. 첫날에 생각보다 빠르게 나오길래 욕조 있는 숙소를 고를 필요가 없었나 싶었는데 매일 욕조에 들어가자고 하는 걸 보니 은근히 뿌듯했다. 오늘은 나에게 함께 들어가자고 했다. 아내는 좀 쉬고 내가 아이들과 함께 욕조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내가 서윤이는 조금 소화를 시키고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서윤이에게는 조금만 있다가 들어오라고 하고 소윤이와 시윤이만 데리고 들어갔는데, 서윤이가 무척 서럽게 울었다. 서럽게 울기만 했으면 됐을 텐데, 악다구니를 썼다. 덕분에 아내와 강력한 훈육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 아직 서러움을 간직한 채로 욕조에 들어왔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루미큐브를 했다. 소윤이는 혼자, 시윤이는 내가 도와주고, 서윤이는 거의 내가 하고, 아내도 함께 했다. 두 판을 했다. 꽤 긴 시간이긴 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집이라면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여행이었고, 또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내일이면 벌써 마지막 날이라니”


우리 모두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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