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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02. 2023

초인적인 육아력

23.03.29(수)

아침에 잠깐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수요예배가 시작할 즈음에 나왔다. 정상적이었다면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예배 시간이 임박하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난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아내의 목소리에서 깊은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배경음악처럼 시윤이의 울음 아니 짜증에 가까운 소리도 들렸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묻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을 때였는데 늦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보면, 거쳐야 할 산이 많다고 느꼈던 것 같다. 밤에 아내에게 물어보니 예배가 거의 끝날 때 쯤 왔다고 했다. 아내의 기분이 어땠을지 아주 조금은 상상이 됐다.


아내와 아이들은 예배를 마치고 처치홈스쿨 식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간다고 했다. 멀지는 않지만 걸어가는 건 어려운, 20여 분 떨어진 공원으로 간다고 했다. 날씨가 흐리지는 않았지만 미세먼지가 엄청 심했다. 자녀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요소였겠지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도 막 집에 가려고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내는 저녁에 성경공부 모임에 가야 했다.


“여보. 내가 그쪽으로 갈까? 내가 애들 데리고 오면 여보는 거기서 바로 가면 되잖아”


그렇게 하면 성경공부 모임을 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으니 아내가 혼자 보낼 시간이 생기는 셈이었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아내는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모임을 하려면 집 쪽으로 와야 하니 굳이 자기가 있는 쪽으로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집에 먼저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기다렸다.


“여보. 우리 조금 더 늦어지겠네”


자녀들과 함께하는 일정에는 언제든 변수와 돌발상황이 난무한다. 나에게 안 좋을 건 없다. 그렇다고 좋을 것도 없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갑자기 생긴 혼자만의 시간은 (설령 그게 엄청 짧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 그렇지도 않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잠시 누리는 시간일 뿐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내가 처음 얘기했던 시간보다는 훨씬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아내는 중간에 장도 봤다고 했다. 아내는 무척 힘들어 보였다. 생각보다 고된 시간이었다고 했다. 즐겁게 잘 놀긴 했지만, 엄마 선생님들은 꽤 큰 체력 소모가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장 본 것만 정리하고 바로 나갔다. 혼자 자녀를 봐야 할 때, 특히 세 명을 봐야 할 때는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 일단 자녀들 저녁 차려 주고 한 명씩 샤워시키고, 머리 말려주고,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 전에 꼭 해야 하는 ‘루틴(물 마시기, 로션 바르기 등)’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기 등의 과정을 마친 뒤 아이들을 눕히고 나면, 싱크대 앞에 선다. 설거지를 하고 주방 정리도 하고. 여력이 되면 세탁기도 돌리고.


서윤이는 오랜만에 나와 강력한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 소윤이를 씻기려고 화장실에 있었는데 서윤이가 시윤이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야아아아악. 그거 내 이불이야아아아아악”


시윤이에게 누나 씻는 동안 거실 정리를 하라고 했는데, 거실에 서윤이가 깔아 놓은 이불이 있었다. 낮에 노느라 갖다 놓은 이불이었다. 시윤이는 아빠의 말을 잘 지키기 위해 착실하게 이불을 철거(?)했고, 서윤이는 그런 오빠에게 자기 이불 마음대로 치우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거다. 요즘 서윤이가 이런 모습을 종종 보인다. 시윤이가 악다구니를 부리는 것과 비슷하다. 태도와 모습만 비슷한 게 아니라 구사하는 표현도 판박이다. 시윤이에게 배운 거다.


소윤이를 씻기다 말고 나와서 서윤이에게 일단 벽을 보고 서 있으라고 했다. 소윤이를 마저 씻기고 시윤이까지 씻기고 난 뒤에 서윤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강력한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 서윤이는 훈육이 끝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서러움을 안고 있었다. 샤워도 안 하겠다고 했다. 한참을 안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품을 거부하는 건 아니었다. 계속 나에게 안겨 있기는 했다.


아이들을 눕히고 나니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뿌듯했다. 나에게 주어진 과업(아무도 나에게 지시하지 않았지만)을 잘 수행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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