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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03. 2023

비밀스러운 선물

23.03.30(목)

늦게 퇴근하는 날이었다. 당연히 아내에게는 미리 얘기했고, 어제 자기 전에도 얘기했다. 아내도 알고 있었지만, 슬퍼했다.


“왜? 왜 늦게 와?”


아내는 오늘 새벽기도에 다녀왔다. 어제 자기 전에 전의를 많이 상실한 모습이라 당연히 못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내는 어제와 똑같이 침대에서 자고 있었지만, 잠옷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아내는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 새벽기도에 다녀와서 바로 누운 듯했다. 대단한 의지라고 생각했다.


낮에는 호떡을 만들었다고 했다. 소윤이의 숙원 사업이었다. 호떡 만들기는 할 때마다 숙원 사업인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자주 하기가 쉽지 않다. 생각으로는 별로 어려울 게 없는데 막상 하다 보면 은근한 소모를 유발하는 활동이다. 특히 세 자녀 사이에서 유발되는 각종 갈등과 ‘내가 할래’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얼마 전에 소윤이가 아내에게


“엄마. 저는 엄마랑 둘이 빵이나 쿠키 같은 거 한 번 굽고 싶어여. 동생들이랑 ‘내가 한다. 니가 해라’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 거다. 즐겁자고 시작해서 울음이나 분노로 끝나지 않으려면 아내의 깊은 인내가 수반되어야 한다.


서윤이는 아내가 화장실에 가면 문 앞에 서서 엄청 운다고 했다. 아내가 녹음을 해서 보내줬는데 우는 게 아니라 고성이었다. 슬픈 게 아니라 짜증이었고. 물론 출발은 ‘엄마와 떨어지지 않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그것만 존중해 주기에는 너무 고래고래 악을 썼다. 결국 아내와 강력한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배우지 않아도 되는 오빠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는 서윤이를 어찌해야 할 지 약간은 고민이다. 정말 판박이처럼 그대로 따라 한다.


아내와 소윤이는 비염이 엄청 심했다. 미세먼지와 꽃가루의 영향이 겹쳐서 그런지 정말 심했다. 아내는 마치 방금 운 사람처럼 눈이 부었고 코도 꽉 막혔다. 소윤이도 아내와 마찬가지였는데 자면서도 계속 짜증을 냈다. 숨쉬기가 너무 괴로우니까 깊이 잠을 못 자고 뒤척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듯했다.


그렇게 깊은 잠을 못 자던 소윤이는 아주 늦은 시간에 깨서 나왔다. 아내와 나도 자려고 준비하던 참이었다. 소윤이와 식탁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소윤이 주변의 여러 사람을 소윤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었다. 흥미로우면서도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명확히 정의를 내리는 게 신기했다.


엄마는 좋다. 항상 좋다. 이유도 없다. 아빠는 재미있다. 좋을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다. 같이 놀 때 좋고 혼날 때 안 좋다. 시윤이는 좋지만 아닐 때도 있다. 평생 못 보는 건 안 되지만, 1년 정도 안 보는 건 괜찮다. 귀여울 때도 있다. 멋쩍게 웃을 때. 서윤이는 귀엽다. 외할머니는 좋다. 항상 좋다. 외할아버지도 좋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놀아 줄 때 제일 좋다. 할머니도 좋다. 놀 때 좋다. 할아버지는 좋은데 언제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삼촌은 좋다. 숙모는 잘 모르겠다. 고모도 잘 모르겠다. 고모부도 잘 모르겠다. K 이모는 좋다. 친절해서 좋다. L 이모도 좋다. L 이모도 친절해서 좋다. K 삼촌과 Y 삼촌은 잘 모르겠다. 목사님도 좋다. 친절해서 좋다. 사모님도 마찬가지고.


소윤이답게 나름대로는 명확한 기준이었고, 납득이 가는 해석(?)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소윤이를 안방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동생들이 없던 시기를 생각하면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월등하게 많은 시간을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윤이 기억에 없는 아득한 옛날이다. 요즘은 동생들에게 치이느라 흔하지 않은 일이 됐다. 소윤이는 언제나 강력하게 원하지만.


코 때문에 잠도 설치고 그러니 오늘 특별히 선물처럼 아내와 나 사이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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