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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06. 2023

꼭 필요한 회피술

23.04.05(수)

저녁에도 예배를 드리다 보니 해야 할 집안일이 쌓이고 있다. 특히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게 빨래다. 베란다에 나가면 켜켜이 쌓인 빨래 동산을 볼 수 있다. 급기야는 속옷과 양말 소진 사태에 이르렀다. 아내는 오늘 낮에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빨래는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루가 너무 빠르네요. 오늘 할 일이 빈 틈 없이 많아서”


아마 쉴 새 없이 ‘세탁기 돌리고 건조기로 옮기고 또 개고’의 과정을 몇 번 했을 거다. 그 틈을 촘촘히 채우는 끼니와 각종 갈등과 민원 해결까지. 아내 말처럼 시간의 흐름을 느낄 겨를과 여유 없는 하루였을 거다. 거기에 중간 중간 큰 위기도 겪었고.


“멘탈 괜찮으신가?”

“심각한 위기 직전에 서윤이랑 잤어요”


일종의 회피술이다. 아내 나름의 위기 극복 방안이랄까.


퇴근했을 때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기 전이었고 소윤이는 체스를 두자고 했다. 얼마 전에 문구점에 가서 자기 용돈을 주고 체스판을 하나 샀는데 1,600원이라고 했다. 내 두 손으로 체스판 전체가 가려질 만큼 작고 아담한 크기의, 그만큼 얄궂은 체스판이었다. 그래도 소윤이에게는 ‘소비의 즐거움’과 다소 머리를 써야 하는 ‘고차원 놀이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구였다. 사실 나도 체스를 잘 두지는 못한다. 아니, 초하수다. 길만 아는 정도인데, 아이들이 보기에는 엄청 잘 두는 것처럼 보이거나 그럴 거라고 예상을 하나 보다. 소윤이와의 대국이 끝나고 나니 시윤이도 두자고 했다. 시윤이가 길을 알까 싶었는데 의외로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시윤이와의 대국이 아직 끝나기 전에, 저녁 식사 준비가 먼저 끝났다.


“시윤아. 이제 밥 먹어야겠다”

“아빠. 그럼 이대로 뒀다가 밥 먹고 시간 있으면 또 두자여”

“어, 그런데 아마 밥 먹고 나면 시간이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시간이 나면”

“아마 그 혹시가 안 될 거야. 벌써 여섯 시가 넘었잖아”


시윤이도 그건 쉽게 수긍했다. 한 쪽으로 말의 분포를 그대로 보존한 체스판을 옮겼다. 오늘은 아니더라도 내일 혹시 가능하다면 대국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내일 낮에 저거 때문에 또 사단이 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국 진행을 보존해야 하는 시윤이와 그렇지 않은 소윤이나 서윤이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는 소재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역시나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은 없었다. 제 때 맞춰 나가기에도 바쁘고 분주했다.


오늘도 자녀들은 예배를 잘 드렸다. 아내와 내가 문제였다. 누적된 피로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기도할 힘이 생겼는지 꽤 늦게까지 기도를 했다. 난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1층으로 내려가서 기다렸다. K의 자녀들도 함께 있었다. 그때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기르는 강아지 두 마리의 목줄을 풀어주셔서 그 녀석들이 교회 1층 로비로 막 뛰어들어왔다. 덕분에 자녀들은 뜻밖의 즐거움을 누렸다. 서윤이와 K의 막내는 관심은 있지만 정작 달려오면 너무 무서워해서 아빠들의 보호가 필요했고, 나머지 자녀들은 친구처럼 잘 어울렸다. 목사님이 주신 강아지 간식을 들고


“앉아”

“기다려”


를 외치며 복종 훈련을 한다고 열심이었다. 그간 엄마와 아빠에게 훈육 받던 설움과 한을 푸는 건가 싶기도 했고.


덕분에 집에는 엄청 늦게 왔다.


“와아. 진짜 늦었네”

“그러게”

“배고프다. 뭐 시켜 먹을까?”

“뭐?”


아내와 내가 고른 건 떡볶이였다. 아내는 빵과 커피는 끊고 있지만, 떡볶이는 먹는다. 빵과 커피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먹는다. 아내는 상징성이라고 했다. ‘빵’과 ‘커피’가 가지는 아내 인생에서의 상징성을 고려해 결정한 금식 품목이라고 했다. 난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웃기만 해도


“뭐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라며 귀엽게 발끈했다.


떡볶이는 만족스러웠다. 배고픔을 채우는 포만감은 물론이고 정서적인 만족도 있었다. 고난주간에 걸맞지 않는 행태인 것 같아서 드러내 놓기는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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