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깨아빠 Dec 06. 2023

아, 저녁 먹어서 괜찮...아니구나

23.04.06(목)

아내는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홈스쿨을 하는 소윤이가 이제 본격적인 ‘학습’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시기가 되었는데, 교재를 받으면서 오리엔테이션의 시간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소윤이가 듣는 건 아니었고, 홈스쿨을 하는 소윤이를 지원하는 아내가 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아내가 들어야 하지만, 자녀 셋을 모두 데리고 가는 건 변함없었다. 차로 20여 분 정도 가야 하는 교회로 가야 했다.


잘 갔냐는 나의 물음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엄청 지치네”


아마 막 도착했을 때였을 텐데 벌써 그런 반응이 나왔다. 시간에 맞춰 나오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한 과정 자체가 이미 큰 소모를 유발했을 거다.


아내는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동네로 왔다. 아내는 이미 거의 소진 상태였던 것 같았다. 잠깐 통화를 했을 때, 목소리가 그랬다. 차마 집으로 가서 밥을 차려 먹일 기운이 없었던 아내는 집 근처의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아무 욕구가 안 생기네. 여보 나 진짜 힘들당. 아침도 못 먹고 녹차라떼 한 잔 마셨는데 진이 빠지네”


이 한 문장이 아내의 오늘 하루를 요약하는 듯했다. 밥을 안 먹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시간과 일정, 육아에 쫓기다 보니 밥 생각도 안 하게 됐고 생각이 났을 때는 아무런 욕구가 느껴지지 않는, 그로기 상태였달까.


오늘 저녁에는 처치홈스쿨 팀이 찬양인도라 함께 모여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내는 미리 주문한 여러 개의 김밥을 찾아서 교회로 왔다. 교회에서 일을 하던 나는 교회로 퇴근 아닌 퇴근을 했다. 공간의 이동은 없었지만 노트북이 아닌 자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퇴근의 기쁨이 느껴지기는 했다.


오늘은 예배를 마치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함께 처치홈스쿨을 하는 선생님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처치홈스쿨 식구들, 그러니까 자녀들도 모두 데리고 다녀왔다. 늦은 시간이라 조문객이 거의 없었는데, 상을 당한 처치홈스쿨의 선생님도 안 계셨다. 미리 말을 하고 간 게 아니라서 우리가 도착하기 조금 전에 집에 가셨다고 했다. 그나마 그 선생님의 어머니가 교회에서 몇 번 예배를 드리신 적이 있고 안면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아는 사람 없는 장례식에 가서 인사를 할 뻔했다.


진짜 민망한 상황은 따로 있었다. 자녀들을 데리고 간 덕분에 워낙 대식구였다. 어른 여섯에 자녀 여덟이었다. 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인사만 드리고 바로 오는 것도 좀 이상하다 싶어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식사를 갖다주겠다고 하셨는데, 다들 저녁을 먹어서 괜찮다고 하면서 사양했다. 마른 안주, 고기, 떡, 과일 등의 기본 상차림(?)만 갖다 주셨는데, 아이들이 너무 잘 먹었다. 고기를 막 손으로 집어먹고 음료수도 먹고, 떡도 많이 먹고. 열심히 찬양을 하며 예배를 드린 덕분인지 몇몇 어른들도 아주 잘 먹었다. 빈 접시를 몇 번이나 다시 채웠다. 괜찮다며 사양한 밥과 국이 민망했다. 자녀들에게 ‘원래 상을 당한 집에 가서는 잘 먹고, 잘 웃고, 잘 놀고 오는 게 우리나라의 문화였다’라는 걸 얘기해 줬다.


상을 당한 집에 가서 대접해 주는 음식을 잘 먹는 건 예의에 매우 합하는 일인데, 끊임없이 ‘더 주세요’를 외치는 아이들이 민망했던 건 어떤 이유였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꼭 필요한 회피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