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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06. 2023

너무 늦지 않게 오자

23.04.08(토)

오랜만에(진짜 오랜만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상 그랬다) 아무 일정이 없는 토요일을 맞았다. 소윤이는 일찍부터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면서 어디라도 나갈 건지, 집에 있을 건지를 물어봤다. 어디든 나가자고 했다. 사실 아내와 어제 이미 어디를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결정은 내리지 못했지만 몇 군데 후보를 정해 놓기는 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어봤다. 소윤이는 아내와 내가 정한 후보지에 없는 곳을 얘기했다. 누나의 얘기를 들은 시윤이도 거기가 좋다고 했다. 원래 아내와 나의 계획은 공원이나 운동장에 가서 자전거도 타고, 킥보드도 타고, 공놀이도 하는 거였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얘기한 곳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아내는 조금 더 가볍게, 그러니까 우리 동네 근처에서 산책 정도 하는 걸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아이들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의견대로 결정했다.


대신 아내는 집에 일찍 오는 걸 목표로 삼자고 했다. 대체로 지키기 어렵고, 달성하지 못할 때가 많은 목표이긴 했다. 그러려면 일단 빨리 나가야 했다. 저녁을 밖에서 먹을지 집에 돌아와서 먹을지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밖에서 먹게 될지도 모르니 점심은 싸서 가기로 했다. 밖에서 두 끼를 연달아 사 먹는 건 여러모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남아 있는 밥을 탈탈 털어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가려고 했는데, 아내가 보온 밥통에 밥과 재료를 담아 가기만 하고 먹을 때 조그맣게 말아서 주자고 했다.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가고 싶다고 한 곳은 어느 마을이었다. 고래잡이 배가 드나들던 항구가 있는 마을이었는데 보통 박물관이나 생태체험관, 테마거리 산책 등으로 즐기는 곳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거기서 여러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다. K의 자녀들과 함께 박물관에 갔던 것도 재미있었고, 거기서 했던 축제에 참여했던 것도 즐거웠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것도 즐거웠고. 정확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를 가자고 했다. 가서 무얼 하든.


날은 맑고 화창했는데 바람이 엄청 많이 불었다. 바깥에 오래 머물 만한 날씨가 아니었다. 일단 박물관에 갔다. ‘고래박물관’이라서 고래에 관련된 다양한 전시와 설명이 많았다. 처음 가 보면 제법 볼 만하고 신기한 것들이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미 한 번 본 거라 처음처럼 흥미롭지는 않았을 거다. 엄청 넓지는 않아서 순서대로 빼 놓지 않고 관람을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1층에는, 액정화면에 있는 고래에 색칠을 하면 앞쪽 큰 화면에 그 고래가 나타나서 헤엄치는 장치(?)도 있었다. 뭔가 ‘디지털스러운’ 요소가 있는 거라면 일단 흥미를 가지는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에게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 얘기를 들었다.


박물관에서 나온 뒤에 야외 의자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나올 때 싸 온 주먹밥이었다. 아내가 나에게 물어봤을 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는데, 세찬 바람이 부는 한 가운데서 의자에 앉아 비닐장갑을 끼고 주먹밥을 한 알 씩 말아서 아이들 입에 넣어주는 모습은 생각보다 궁상스러웠다. 궁상맞은 모습에 비해 맛이 너무 기가 막힌 게 함정이었다. 멈추기 어려웠다. 관리실에서 일을 하는 직원이 지나가시면서


“어우, 너무 보기 좋아요”


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진심인 것 같았는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보일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강력한 바람 속에서도 맛있게 먹고, 후식으로 과자까지 먹었다.


소윤이는 그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예전부터 K의 첫째가 ‘너무 재밌는 놀이터다’라는 얘기를 많이 했고, 언젠가 한 번 가 보자고 한 걸 아직도 못 가 본 거다. 오늘이 절호의 기회이긴 했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게 변수였다. 아내는 다음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엄청 춥지는 않아도 계속 바람을 맞으니 쌀쌀하기도 했고, 안 그래도 비염으로 고생하는데 밖에서 바람을 너무 많이 맞는 것도 염려스러웠다. 정말 신선하고 독특한 놀이터인지 찾아봤는데 사진으로 보기에는 보통의 놀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래를 주제로 꾸며 놓은 게 특색이긴 했지만, 색다른 놀이기구가 있고 그런 건 아니었다.


“소윤아. 이거 봐봐. 엄청 재밌어 보이지는 않는데? 다른 놀이터랑 비슷한데?”

“음, 그러게여”


소윤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안 가도 된다고 했다.


대신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다. 6층 짜리 문화공간 안에 있는 카페였는데, 평소에는 항상 한산한 곳이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사람이 북적였다. 소극장에서 어린이 연극을 하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또래의 자녀들과 함께 온 부모가 많았다. 일단 카페에 들어갔는데 남은 자리가 별로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고 아내와 나는 그 근처의 다소 불편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이 나갔고, 아내가 얼른 가서 자리를 이동했다. 덕분에 갑자기 데이트가 됐다. 서윤이는 유모차에서 잤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내와 내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책을 읽었고. 아내와 나는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보이는 항구 풍경을 감상하며 커피를 마셨다.


아내는 책을 하나 골라왔다. 문학책이었다. 솔직히 조금 읽다가 바로 졸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의외로 졸지 않고 한 장 씩 잘 전진했다. 내가 옆에서 웃었더니 아내는


“왜 놀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라면서 발끈했다. 놀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의미 없는 웃음도 아니었다. 그 즈음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내와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의 독서권(?)을 보장하기 위해 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건물 구경을 했다. 1층부터 한 층 씩 차례대로 구경을 했는데, 공연장에서 하는 공연을 보면 모를까 그 자체로 볼 게 많은 곳은 아니었다. 어느 층에서는 작은 마술 공연(까지는 아니고, 복도에서 탁자 하나만 펴 놓고 20-30분 정도 진행하는)을 하고 있었다. 잠시 서서 소윤이와 시윤이와 함께 관람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마술을 볼 때도 놀라거나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재미가 없는 건가 싶어서 물어보면 재미있다고 했다.


“소윤아, 시윤아. 너네 재미있어?”

“네”


큰 호응을 하는 건 부끄러워서 못한 것일 뿐, 엄청 재미있었다고 했다.


“아빠. 이따 네 시에 또 오자여”


못 본 앞부분의 공연을 봐야 하니 또 오자고 했다. 아내와 서윤이가 있는 카페로 다시 돌아갔다. 서윤이는 잠에서 막 깼을 때였다. 아내는 의외로(?) 무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너무 재미있다고 하면서. 잠시 잊고 있던 문학소녀의 감성이 깨어난 건가.


자리를 정리해서 마술 공연을 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여전히 겉으로는 굉장히 뜨뜻미지근한,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재미있게 느끼는 반응과 함께 마술 공연을 관람했다. 서윤이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건지, 아니면 잠이 덜 깬 건지 아무튼 계속 나에게 안겨 있었다.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몇 가지 후보를 주고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파스타와 피자, 중국음식, 불고기 전골, 고기를 후보로 줬다. 잠깐의 논의 끝에 고기를 먹기로 했다. K의 아내가 가성비가 좋다고 추천해 준 곳이었다. 사람이 엄청 많았는데 운이 좋게도 우리는 꽤 독립적인 자리에 앉게 됐다. 오늘도 자녀들은 잘 먹었다. 맛은 그저 그랬지만, 다른 고깃집에 비해서 가격이 꽤 저렴해서 아이들과 함께 가서 배부르게 먹고 싶을 때는 찾기 좋은 곳이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저녁을 먹기 전에 한살림을 들렀는데, 밥을 먹고 나서도 한 번 더 들러야 한다고 했다. 운전은 아내에게 맡겼다. 한살림에 갔다가 K네 집에도 들러서 뭔가를 전달해 주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는 동안, 난 조수석에서 푹 잤다.


아내의 ‘너무 늦지 않게 와야겠다’는 다짐 혹은 바람은 역시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엄청 늦은 건 아니었고 평소와 비슷하게 늦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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