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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09. 2023

꾹꾹 참다가 결국

23.04.10(월)

아침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시윤이와의 관계에서 폭발을 방지하기 위한, 그러니까 심지가 다 타들어 가고 이제 폭발에 임박한 시점에서 성사된 통화였다.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면서 ‘시윤이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전화했다’라고 했다. 항상 그렇다. 아내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자기 선에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한다. 일을 하는 남편에게 실시간으로 집안의 모든 부정적인 상황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전화를 했을 때는, 대체로 아내도 정말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일 때가 많다. 문제는 나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아내였지만, 시윤이와 한참 통화를 했다. 처음 아내와 통화를 할 때 이미 시윤이의 듣기 싫은, 사이렌 같은 음성이 깔리고 있었다. 통신선로를 통해 들어도 이 정도인데 현장에서 직접 들으면 얼마나 괴로울까 싶었다. 시윤이와 거의 30분을 통화했다. 나도 내가 뭘 했는지를 모르겠다. 부드럽게 설명도 하다가, 다소 엄하고 단호하게 훈육도 하다가.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라,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그렇게 통화를 했다.


통화를 끊고 나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열이면 열은 마음이 답답해지고 무거워진다. ‘이게 아빠이자 남편인 내 역할이다’, ‘집에 있는 아내는 얼마나 괴로울까’하는 생각으로 무겁고 답답한 마음을 누르기는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는다. 꽤 큰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런 건 그냥 여보가 알아서 처리해’라고 말하는 건, 별로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다 아내가 정말 힘들 때도 자기 혼자 삭히다가 속병이 날까 봐 겁이 나기도 한다. 내가 좀 안 좋은 영향을 받더라도 나에게라도 말을 하면서 자기 속을 푸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내내 마음이 갑갑했다.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하고는 뭔가 다른, 그야말로 ‘꽉 막힌’ 듯한 마음을 안고 하루를 살았다. K와 점심을 먹고 들른 카페에 디저트도 있었다. 요거트가 주력인 듯했다. 요거트와 휘낭시에를 사서 잠깐 집에 들러서 전해줬다. 나는 스치듯 지나가지만, 얄궂은 요거트와 휘낭시에가, 혹은 그 속에 담긴 나의 마음이 아내와 자녀들의 마음을 녹이길 바라는 몸짓이었다. 결과가 어땠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와, 여보 덕분에 우리가 너무 평안하게만 지냈어요’라는 후기는 들어본 역사가 없다. ‘뭐, 그럭저럭 그래도 괜찮았어요’가 가장 흔한 일상이었다. 오늘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밤에는 아내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빠르게 나가도록, 저녁은 내가 책임지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그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리 얘기를 안 했으니까. 아내는 수육과 김치찜을 오늘의 저녁으로 준비했다. 아내의 마음이 느껴졌다. 다분히 남편인 나를 위한 저녁이었다. 아내도 아침에 전화한 게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다.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굳이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했지만 지나고 보니 미안(?)했을 거다.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아내의 성품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보. 저녁 먹고 나갔다 와”

“어? 갑자기?”


아내는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 이상은, 먼저 ‘자유시간을 달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나가면 갈 데도 마땅하지 않고 할 것도 없으니 강력한 욕구가 생기지는 않아도, 막상 나가면 일단 ‘혼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로운(?) 시간이라는 걸 안다. 아내는 저녁만 함께 먹고 바로 준비해서 나갔다.


서윤이는 낮잠을 안 잤다고 했다. 나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눕히면 바로 잘 테니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체스를 두자고 했다. 소윤이 한 판, 시윤이 한 판 이렇게 차례로 두자고 했다.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했더니


“아빠. 그럼 우리끼리 둬도 돼여?”


라고 물어봤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다. 약간 반갑기도 했다. 피로가 정점을 향해 가는 시간이라 만사가 귀찮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끼리 둔다고 하니 좋기도 했다. 난 체스를 두는 소윤이와 시윤이 옆에 누워서 구경을 했고, 서윤이는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산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윤이의 부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얘들아. 서윤이는?”

“모르겠어여”


안방에 다녀 온 소윤이가 대화를 이어갔다.


“아빠. 서윤이 침대에서 잠들었어여”


서윤이는 침대에 한 가운데 누워서 곤히 자고 있었다. 뭘 하다 거기 눕게 됐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것 같았다. 아빠인 나처럼. 서윤이는 그대로 두고 난 다시 소윤이와 시윤이 옆에 누웠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체스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30분 가까이 이어지는 체스에 잔소리 혹은 강제종료의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내가 하라고 했으니까. 그때 갑자기 시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똥 마려…아빠. 똥을 쌌어여”


조는 와중에도 붙잡고 있던 이성과 통제의 끈을 놓아버렸다. 시윤이에게 엄청 짜증을 냈다. 참을 걸 참아야지 그런 걸 참으면 어떻게 하냐고. 말 그대로 짜증을 분출했다. 서윤이는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고. 화장실에 가자마자 놓았던 이성의 끈이 자기가 알아서 붙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짜증을 냈나’

‘시윤이에게 너무 미안하네’

‘하아. 난 왜 이럴까. 그걸 못 참고 이렇게 후회할 짓을 하는 걸까’

‘아침에 그렇게 일장연설을 해 놓고 이러는 나를 보면 시윤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윤이에게 바로 사과했다.


“시윤아. 아빠가 짜증 낸 건 정말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시윤이는 괜찮다고 했다. 한 번도 ‘괜찮지 않다’라고 얘기한 적은 없다. 부디 ‘진짜 괜찮기를’ 바랄 뿐이다.


자녀들을 눕히고 식탁에 홀로 앉으니, 오늘 아침부터 방금 전까지 했던 나의 말과 행동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딱 한 가지의 감정으로 요약하라고 하면, 아마 ‘후회’일 거다. 오늘 나의 하루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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