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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0. 2023

누구한테 안길까?

23.04.14(금)

얼마 전에 소윤이가 자기 주변의 여러 사람을 향한 호감도와 그 이유를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외할아버지를 향해서는 이런 표현을 했다.


“할아버지는 좋아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좋아여”


역시나 오늘도 장인어른이 가장 먼저 일어나서 세 자녀를 맞아주셨다. 난 부지런히 준비해서 출근을 하려고 했는데 배가 고프다는 아이들의 외침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어제 아무것도 안 먹은 거나 마찬가지인 소윤이는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시윤이와 서윤이가 배가 고프다고 난리였다. 평소에 비하면 어제 매우 적게 먹기는 했다.


출근 차림을 갖추고 주방에 섰다. 간단하게 계란밥을 해 주려고 하다가, 방울토마토가 보이길래 토마토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왕 그렇게 할 거면 조금 더 맛있게 해 주고 싶어서 파도 썰어서 파기름을 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는 가족이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그런 맛이었다. 소윤이는 아직 입맛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지 매우 차분하게 먹었다. 시윤이와 서윤이도 더 먹지는 않았다. 입맛이 돌아오지 않은 게 아니라 맛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았다. 몇 숟가락 뜨는 걸 보고 나서 나왔다. 오늘 아침이 되면 상태가 매우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소윤이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걱정이었다.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소윤이는 잔다’는 아내의 메시지를 받았다. 너무 못 먹어서 지쳤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딘가 안 좋아서 그런 게 아니길 바랐다.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내가 진짜 전화를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너무 답답하네.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네. 엄마랑 아빠까지 있는데 저러니까 미치겠어”


며칠 전처럼, 아내의 목소리 뒤로 시윤이의 경보음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같은 단어를 공백 없이, 매우 듣기 힘든 억양으로 반복했다. 오죽하면 전화했을까 싶었다. 친정 부모님 앞이니 어떻게든 ‘잘’ 지내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을 텐데, 엄청난 비협조자가 한 명 있는 셈이었다.


“여보. 시윤이 바꿔줘”

“아니야 여보. 여보 며칠 전에도 기분 안 좋아졌잖아”

“괜찮아. 어차피 전화했는데 뭐. 바꿔 봐”


또 시윤이와 통화를 했다. 며칠 전에 시윤이와 통화를 할 때, 심호흡을 알려줬다. 자기도 짜증을 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다고 하길래, 그럴 때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걸 다섯 번 반복해 보라고 했다. 머리로는 ‘짜증 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라고 했고. 몇 번의 실습(?)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실천을 하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감정 배설을 멈추고 숨을 한 번이라도 쉴 수 있는 통제력이 생겼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진보였다. 나에게나 시윤이에게나. 시윤이에게 그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통화 마지막 즈음에는 다소 엄하게. 계획된 건 아니었다.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며칠 전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잠시 후 아내가 메시지를 보냈다. 아내는 나를 ‘숨구멍’이라고 표현했다. 나에게라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면 숨이 막힌다는 뜻이었다. 나도 예수님처럼 마음이 한량없이 넓어서 어떤 말이든 상황이든 다 품어주면 좋으련만, 내가 기르는 자녀보다도 덜 된 인간이라 그럴 만한 아량이 없는 게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며칠 전에 예방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그때만큼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장인어른은 잠시 경주에 다녀오신다고 했다. 사실 우리 집에 오시려고 출장을 잡으신 셈이었다. 아내와 아이들, 장모님은 장인어른이 일을 마칠 시간에 맞춰 나가서 함께 점심도 먹고, 카페에도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상태가 관건이었다. 시윤이는 이미 정상이라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서윤이는 사실 어제부터 괜찮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걱정스러웠던 소윤이는 자고 일어나서는 괜찮았다고 했다.


다들 점심을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배를 채울 만큼은 먹었다고 했다. 퇴근해서 만난 아이들은 모두 멀쩡했다. 특히 소윤이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침에는 얼굴이 푸석푸석 했는데, 퇴근하고 봤을 때는 평소처럼 윤기가 흘렀다.


아이들을 일찍 눕힌다고 눕혔는데, 그렇게 이른 시간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만난 만큼 매정하게 ‘자라’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뭔가를 한 것도 아니었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늦어졌다. 육아가 원래 그렇다.


보통은 아이들을 눕히고 나면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오늘은 장인어른이 무척 피곤해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는 출근하셨다가 장거리 운전을 하고 오셨고, 오늘은 경주에 다녀오셨다. 남는 여가 시간에는 업무만큼 고된(그러나 좋은) 손주 육아로 촘촘하게 채우셨고. 피곤한 게 당연하셨다. 아내와 내가 잠시 마트에 다녀오는 동안 장인어른은 방에 들어가서 잠드셨고, 장모님이 한 차례 가서 깨우셨는데도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 정도의 피곤과 고단함을 감수하고서라도 400km에 육박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는 동력은, 두 말 할 것 없이 손주들이다. 서윤이는 저녁 먹고 잠시 쉬는 시간에 거실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서서 뜬금없이 이렇게 얘기했다.


“누구한테 안길까? 알아맞혀 보세여. 딩동댕”


그러고는 할아버지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문자로 표현이 잘 안 되지만, 정말 ‘여우’ 같았다. 아내와 내가 함께 목격했는데, 그야말로 ‘막내’다운 모습이었다. 시즌이 끝난 프로야구 판에서 돈만 있으면 누구든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시장가치가 높은 FA 선수 같은 모습이었다. 그 당당함과 자신감이란. 그런 손주가 있으니 무겁디 무거운 피로를 무릅쓰고 오시는 거다.


결국 장인어른은 계속 주무셨고 아내, 장모님과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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