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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0. 2023

4시간의 거리

23.04.15(토)

오늘도 역시나 장인어른이 가장 먼저 일어나신 것 같았다. 축구를 하고 집에 왔더니 장인어른이 자녀들과 재밌게 놀아주고 계셨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셋 모두 완전한 정상의 모습이었다. 밥도 잘 먹었고 상태도 좋아 보였다.


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집안일은 장모님이, 육아는 장인어른이 돕고 아니 거의 다 맡아주셨기 때문에, 한량처럼 침대에서 뒹굴어도 괜찮았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잠시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사치를 누렸다. 평소라면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거니와 아이들이 득달같이 와서 뭘 하는 거냐며 달라붙었을 거다.


아이들이 탈이 난 덕분인지 이번에는 유독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제 아내와 장모님, 아이들은 나들이 기분이 나는 카페에 갔다 오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럴 싸한 곳에 다 함께 가 볼 시간이 없었다. 사실 이번에만 그런 게 아니기는 했다. 매번 그렇기는 했다. 어쨌든 마지막 날이니 조금 나들이 다운 나들이를 나가보려고 이곳저곳 떠올리고 검색도 했다.


먼 곳, 가까운 곳, 아주 먼 곳 등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다. 마트에도 들르고 문구점에도 들러야 한다고 해서 너무 먼 곳과 먼 곳은 배제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야외에 있는 건 어려워 보였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은 적이 있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우선 점심부터 먹어야 했다. 아내가 집 근처에 있는 ‘저렴하지만 맛이 좋은’ 중국음식점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맛과 가격이 정말 훌륭한 곳이기는 했지만 장인어른과 장모님과 함께 가기에 적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내에게 다른 곳을 생각해 보자고 했는데 장모님은 뭐 어떠냐고 하시면서 거기로 가자고 하셨다.


어른들은 각자 하나씩 음식을 시켰고 아이들은 어른들 것을 십시일반(?) 나눠줬다. 그걸 고려해서 곱빼기를 시켰기 때문에 양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탕수육도 하나 시켰다. 난 탕수육을 하나만 먹었다. 아마 다른 어른들도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을 거다. 서윤이는 아무리 잘 먹어 봐야 그 양이 미천하고. 결국 소윤이와 시윤이가 가장 많이, 대부분을 먹었다는 말이다. 애들 먹는 게 왠지 모르게 신통치 않아 보여서 ‘아직 속이 좀 불편한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충분히 많이 먹은 셈이었다.


마트에 들러서 볼 일을 보고 바로 카페로 갔다. 서윤이는 가는 길에 재웠지만 얼마 안 자고 깼다.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젊은이 느낌이 물씬 나는 카페였다. 꽤 넓은 매장의 모든 자리에 손님이 있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제외하면 내가 최연장자인 듯했다. 젊은이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곳에 가면 대체로 그렇다.


종종 가는 샌드위치 가게 바로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샌드위치 가게와 카페 사이에 놀이터가 있었다. 샌드위치 가게에 올 때마다 놀았던 그 놀이터였다. 비만 안 왔으면 데리고 나가서 놀았을 텐데 비가 온 뒤라 모든 기구에 물이 흥건했다. 그래도 잠시 비가 멈춘 틈을 타서 놀이터에 가기는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만 나갔고, 소윤이는 안 나갔다. 장모님과 아내와 함께 앉아 있겠다고 했다. 하루 하루 지날수록 놀이터는 소윤이에게 흥미 유발의 강도가 옅어지는 곳이 되고 있다.


문구점에도 가야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가장 강력한 이유를 굳이 꼽자면 ‘소윤이가 너무 가고 싶어 했다’였다. 하루 종일 먹다 끝나나 싶지만, 금방 또 저녁 먹을 시간이었고 식당을 예약했기 때문에 문구점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래도 소윤이는 충분히 만족했다. 서윤이에게 줄 비눗방울도 샀다. 작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윤이가 그걸 가지고 놀면서 얼마나 신이 날 지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더 설레는 듯했다. 장모님도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몇 개 샀다. 장모님이기 때문에 사 주는, 아내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 주지 않을 것들도 있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누리는 할머니 특수였다.


누구도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저녁은 먹어야 했다. 아이들도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보였다. 동네의 허름한 곤드레밥 가게였다. 예약을 한 게 민망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동네의 숨은 맛집이거나 사람들이 안 오는 데는 이유가 있는 곳일 텐데, 다행히 이곳은 전자였다. 그것도 엄청 괜찮은. 특히 장모님이 아주 만족하셨다. 사실 어제 대화를 나누며 들은 정보를 활용해 일부러 고른 곳이기도 했다. 장모님은 뭔가 비빔밥, 나물 같은 게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너네 동네 정말 너무 좋은 곳이다. 00는 너무 삭막해. 난 이런 곳에 살고 싶어”


동네에 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큼 마음에 드셨나 보다. 다른 어른들도 배가 하나도 안 고팠는데 막상 먹기 시작하니 다 잘 먹었다.


다 먹고 나니 바로 이별이었다.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어디엔가 틈이 있었는지, 지는 해가 하늘을 아주 붉게 물들였다. ‘노을’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색’이 하늘에 퍼져 있었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차에 타기 전 자녀와 손주에게 인사를 나누셨다. 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모님은 꾹 누르고 있던 눈물을 더는 누르지 못하고 터뜨리셨다.


괜찮아 보였던 아내는 차에 타고 돌아오면서 슬픔에 잠겼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마침(?) 장모님이 옷을 하나 두고 가셨는데 아이들은 이렇게 얘기했다.


“다시 가지러 오셔야겠네. 빨리 전화해여. 다시 오시라고”


아내는 가시고 나니 못 해드린 것만 생각이 난다면서 침울했다. 고작 네 시간 거리로만 떨어져도 이러는데 죽어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헤어지면 어떨까 싶었다. 아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여보. 부모님들이 안 계시면 어떨지 상상이 안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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