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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1. 2023

목욕탕의 여인에서 카페의 여인으로

23.04.18(화)

오전에 교회에서 일을 했고 아내와 아이들도 처치홈스쿨을 하러 교회에 왔다. 처치홈스쿨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 얼굴을 보려고 내려갔다. 아내는 하얀 트레이닝 바지에 푸른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여보. 목욕탕 다녀왔어?”


아침 시간, 아내가 얼마나 분주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시윤이에게는 질문을 던졌다. 오늘 아침에는 짜증을 냈는지 안 냈는지. 시윤이는 다소 멋쩍은 듯, 오늘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엄청 칭찬을 했다.


“시윤아. 남은 시간도 잘 해 봐. 알았지?”


어제, 오늘이 아니라 몇 분 전과 후가 다른 게 시윤이와 아내의 일상이지만 그래도 출발이 좋았으니 부디 조금은 나은 하루가 되길 바랐다.


점심도 함께 먹었다. 아내에게 미리 말을 안 해서 급하게 내 몫을 만들었다고 했다. 덕분에 아내가 자기 밥 양을 줄인 듯했다. 내 밥을 더 가져다 먹으라고 해도 한사코 됐다고 하더니 다른 처치홈스쿨 가정의 밥을 더 얻어 먹었다.


오후에는 밖에서 일정이 있어서 K와 함께 나왔다.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K와 대화를 나누다 동네에 있는 ‘소리체험관’에 가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다. 소리를 주제로 한 작은 체험관인데 이번 주까지만 운영을 하고 폐관을 한다고 했다. 사실 소윤이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니까 우리가 이 곳으로 이사 오고 난 후부터 줄곧 ‘한 번 가 보자’라고 얘기를 했었다. 집에서 가까우니 한 번 가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별로 볼 게 없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미루고 미룬 거다. 안 그래도 폐관 소식을 접하고 나서는 ‘이번 주에는 꼭 소윤이 데리고 한 번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K와 그 이야기를 나눈 거다. 바로 각자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K의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내 아내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 어디야?”

“우리? 방금 막 출발했어요”

“아, 진짜? 여보. 우리 오늘 소리체험관 갈까?”

“갑자기? 왜?”

“아, 거기 이번 주에 폐관이라고 해 가지고. 이번 주에 못 가면 소윤이한테 원망을 들을 거 같아서”

“00네도 같이?”

“어. 근데 00는 연락이 안 된다고 하네. 일단 여보는 그쪽으로 바로 가”

“알았어. 애들 오늘 아빠 때문에 자비를 누리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왜?”

“아니, 또 집에 가기 싫다고 하도 불평하고 그래서”

“아, 그랬구나”


상상이 됐다. 집에 가자고 했더니 머릿속에 그려지는 ‘바로 그 표정’을 지으며 삐죽거렸을 거다. 어쨌든 아내와 아이들은 그쪽으로 바로 가라고 했다. K의 아내는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후 아내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받아 보니 K의 아내였다. 오늘 휴대폰을 두고 왔다고 하면서, K의 아내와 자녀들도 그쪽으로 바로 간다고 했다. 어떻게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아내에게 들어 보니 K의 아내가 휴대폰을 두고 온 걸 알고 있던 아내가 교회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한 거였다. 마침 다른 처치홈스쿨 엄마선생님도 아직 집에 가기 전이어서 세 가정이 함께 가게 됐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고, 소문이 나지 않은 잔치에는 더 먹을 게 없는 법이다. 명성대로 볼 게 없기는 했다. 그나마도 폐관을 앞두고 있어서 체험 불가능한 게 태반이었다. 그래도 직접 와서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하고 폐관을 맞이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였을 거다. 다행이었다. 없어지기 전에 한 번은 와 보게 돼서.


저녁도 함께 먹었다. 돈까스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엄청 많았다. 처음 가 보는 곳도 아니었는데 꽤 많이 남았다. 남을 것 같아서 아예 먹기 전에 미리 따로 분류해서 싸 놨다. 내일 처치홈스쿨 모임 때, 점심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약간의 추가와 변형을 가미해서 ‘돈까스 덮밥’으로.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밥도 함께 먹고, 남는 밥도 함께 먹고, 계속 함께 먹고.


밥을 먹고 나오는데 아내들이 잠깐 카페에 가고 싶다고 했다. 다 함께 가는 게 아니라, 아내들끼리만. 자녀들은 남편들이 데리고 있기로 했다. 바로 앞이 바닷가라서 바닷가를 좀 걷기로 했다. 아빠 세 명이 여덟 명의 자녀와 함께 밤 산책을 했다. 바닷가를 따라서 쭉 걷다가 돌아올 때는 모래사장으로 내려갔다. 엄청 뛰었다. 아빠들의 희생(?)으로 아이들의 분출되지 않은 에너지를 모두 발산했다. 아빠들이 뛰고 아이들은 잡으러 다니고. 다들 얼굴 벌개지고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뛰었다. 한 시간 남짓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내들은 카페 1층에 앉아 있었는데, 참 행복해 보였다. 너무 일찍 돌아온 거 같아서 미안할 정도로 좋아 보였다. 그래도 뭐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게 달콤하다고, 한정된 시간에 농축해서 쏟아내는 수다가 재밌는 법이다. 주제가 아무리 미천하더라도.


“여보. 오늘은 내가 애들 씻길게요. 여보 오늘 고생했으니까”


사실 딱히 고생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내가 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질 뿐이었다. 아내는 무척 즐거웠다고 했고, 나에게 계속 고맙다고 했다. 내가 제안한 것도 아니었고 혼자 감당한 것도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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