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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3. 2023

시작은 어두웠으나 끝은 밝으리라

23.04.26(수)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었다. 난 교회에서 일을 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기다렸다. 약간 조마조마했다. 과연 아내와 아이들이 별 일 없이 무사히 시간에 맞춰서 올 것인지.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정신없이 바쁘게 준비하고 있으면 못 받는 게 당연한 시간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전화를 여러 번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더 초조했다. 그러다 거의 시간이 다 됐을 때, 마침내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여보”


아내가 첫마디를 내뱉자마자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이걸 어떤 느낌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무튼 뭔가 허망한 느낌이기도 했고, 맥이 풀리는 느낌이기도 했다.


“난 좀 더 늦을 거 같아요. 아직 하나도 못 씼었어요”


일단 나도 집으로 갔다. 가도 큰 도움은 될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애들 차에 태우는 거라도 손을 보태면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지런히, 뛰는 것과 마찬가지인 빠른 걸음으로 갔다.


아내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다. 마치 나와 다투고 난 뒤의 얼굴처럼,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빠르게 집안의 분위기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아내의 무거운 얼굴과 분위기는 비단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유발된 건 아닌 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내는 서윤이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나서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려보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소윤아. 엄마 왜 그러셔?”


소윤이, 시윤이와 먼저 차를 타러 내려가면서 소윤이에게 물어봤다. 아내는 서윤이와 함께 조금 더 늦게 내려왔다.


“음, 모르겠어여. 누구 한 명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니예여”


소윤이의 관찰 혹은 분석이 정확해 보였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누군가 한 명의 인물 때문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인 오전 시간의 빼곡한 육아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일과 시간 그 자체가 원인이었을 거다. 아내는 예배당에 앉자마자 많이 울었다.


점심도 함께 먹었다. 처치홈스쿨의 다른 엄마 선생님과 자녀들도 있었고 아빠 선생님은 나 혼자였다. 점심을 먹고 자녀들을 데리고 커피를 사러 갔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산책도 할 겸. 혼자 자녀 다섯 명을 데리고 가야 했지만 다들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이라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자기 엄마나 아빠가 아닌 ‘선생님’과 함께 할 때는 오히려 태도가 훨씬 좋기도 하고.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잠시 들렀다. 오가는 자동차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곳이었다. 마음껏 뛰고 소리를 질러도 괜찮은 곳이었다. 기온과 바람, 하늘이 너무 상쾌해서 밖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자녀들은 금세 더워졌는지 겉에 입었던 옷을 벗고 반팔 차림으로 교정을 활보했다. 커다란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뛰고 나니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다. 생수를 사려고 편의점에 갔는데, 각자 먹고 싶은 주스를 막 얘기했다. 아기새들처럼 짹짹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아이스티 하나를 사서 조금씩 나눠줬다. 종이컵으로 반 정도 될까 말까 한 적은 양에도 다들 행복해했다.


엄마 선생님들의 커피를 사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따로 없는 곳이라 신경이 곤두섰지만, 다들 말을 잘 들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자녀 두 명은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자기 아빠가 없었던 덕분에 끝까지 무사히 완주했다.


아내와 자녀들은 오후 일정을 소화했고 나도 일을 마저 했다. 오후에도 날이 여전히 좋았다.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나가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좋았다. 일을 조금 일찍 마무리했다. 아내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아내는 저녁에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서 일찍 나가야 했다. 산책을 하게 된다면, 산책을 하다가 다시 교회로 가면 됐다. 자녀들이야 당연히 뛸 듯이 좋아했고 아내도 산책을 하자고 했다.


아예 교회에 차를 놓고 걸어서 바닷가로 갔다. 건물 사이에 있을 때도 좋은 날씨였지만, 바닷가로 나가니 더 좋았다. 해변으로 내려가서 바닷물이 들이치는 경계선 근처까지 갔다. 거기는 자갈이 깔려 있어서 아이들과 앉아서 바람을 쐬기에 좋았다. 앉아서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고, 아이들은 작은 조개껍데기를 주워서 모았다.


산책과 바람 쐬기를 마치고 나니 생각보다 시간이 늦었다. 아주 잠깐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갈까 고민을 했지만 최근에 외식이 너무 많았다는 아내의 말에 바로 ‘내식’으로 결정했다. 마땅한 반찬이 있는 건 아니었고, 계란밥을 먹기로 했다. 대신 아보카도도 함께 곁들였다. 아보카도를 싫어하는 소윤이는 그냥 계란밥이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자기 직전까지 엄마에게 편지를 쓴다고 난리였다. 아내가 없는 날이면 항상 그런다. 내용은 항상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지겹거나 감동이 없는 건 아니다. 언제나 좋기는 하다. 나는 요즘 편지를 잘 못 받지만.


그러고 보니 내일이 시윤이 생일이다. 잊은 건 아니었지만, 준비에 미처 신경을 못 썼다. 아내는 부랴부랴 필요한 것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난 시윤이 옆에서 잤다. 내일 새벽기도를 간다는 아내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나가는 아내의 소리에 깨지 않기 위해서, 생일을 맞는 시윤이에게 아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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