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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3. 2023

부모보다 나은 자녀

23.04.28(금)

평소보다 출근을 좀 늦게 했다. 아내는 어제 자기 전에 ‘내일은 잠을 좀 푹, 늦게까지 자고 싶다’라고 얘기했다. 자녀들에게 미리 얘기를 했어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였을 텐데, 미처 얘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대신 내가 시간을 조금 벌었다. 아침에 아이들 밥까지 차려주고 출근했다. 아내도 내가 나가기 전에 일어나기는 했다. 아내는 마찬가지로 어제, 나에게 오늘은 조금 일찍 오면 안 되냐고 물어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게 좋으니까.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금방 오후가 됐다. 아내에게 정확히 ‘몇 시’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정도 시간 즈음에는 들어가야 일찍 들어가는 거겠지’ 싶은 시간이 있기는 했다. ‘이제 그만하고 집에 가야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남은 일을 마무리 하느라 조금씩 미뤄졌다. 마침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언제 와요?”

“나? 이제 곧 가야지. 왜?”

“그냥. 어제 일찍 온다고 해서. 언제 오나 싶어서”

“아, 이제 가야지. 힘들어?”

“그런 건 아닌데 머리가 좀 아프네”

“아, 그래? 알았어. 이제 곧 갈게”


소윤이는 하루 종일 나가고 싶어 했는데 결국 못 나갔다고 했다. 집에 갔다가 상황과 시간이 허락을 한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바람을 쐬러 나갈까 싶기도 했다. 어차피 저녁에는 교회에 가야 하니까 조금 일찍 나가는 셈 치고.


아내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빠르게 이전의 상황들을 파악해 보니, 자녀들과 심각하게 안 좋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아내 말처럼, 두통과 전반적인 기력 저하로 인한 무기력함 혹은 우울함이었다. 아내의 우울이 나에게 전이가 되었고, 난 그걸 건강하게 소화해 내지 못했다. 하필 소윤이는 ‘오늘 저녁에 교회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집요하게, 몇 차례나 물어봤다. 난 이미 전이된 우울이 짜증으로 변이한 상태였다. 처음 몇 번은 꾹 누르고


“글쎄. 조금 이따 결정할게”


아내는 특송이라 꼭 가야 했고, 난 가고 싶은 의욕과 마음이 싹 사라진 뒤였다. 그래도 의지를 내어서 가 보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는데, 소윤이가 계속 그렇게 물어볼 때마다 열려서는 안 되는 감정의 빗장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러다 결국 또 물어보는 소윤이에게 아주 차갑게, 그리고 퉁명스럽고 짜증스럽게 ‘그만 좀 물어보라’면서 쏟아냈다. 내가 시윤이에게 ‘짜증이 날 수는 있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고 말고는 너의 선택이다’라고 말하는 딱 그 상황이었다. 소윤이 입장에서는 날벼락이었다. 아니 날벼락도 아니지. 뭐라고 해야 할까. 길을 걷다가 갑자기 뺨을 맞은 기분이었을까. 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내에게, 그리고 나머지 식구 모두에게 쏟아냈다.


감정을 배설하고 나니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시윤이도 매일 이렇게 후회하나’, ‘역시나 시윤이가 그러는 건 나 때문이었나’하는 생각을 했다. 여러 의미에서 잠시 동굴이 필요했지만, 동굴은 없었다. 안방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보며 잠시 현실에서 도피했다. 소윤이는 나의 배설을 받아낸 뒤로, 꽤 한참 동안 서럽게 울었다. 아내는 맞받아치지 않고 그냥 자기 할 일을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눈치껏 얌전히 굴었고.


소윤이가 나에게 오더니 얘기했다.


“아빠. 아까 제가 아빠한테 계속 물어봐서 미안해여”

“아니야. 소윤아. 오늘은 소윤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아예 하나도 없어. 아빠가 잘못했지. 아빠가 괜히 짜증 낸 거지. 소윤이는 오늘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아빠가 미안해. 짜증 내서”


형보다 나은 아우는 없어도, 부모보다 나은 자식은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진 걸 감지하고 안방으로 들어온 시윤이와 서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


“시윤아. 미안해. 아빠가 짜증 내서. 시윤이한테 짜증 내지 말라고 해 놓고 아빠가 그랬네”

“괜찮아여”


아내에게도 사과를 했다. 아내도 나에게 사과를 했고.


“아니야. 오늘은 내가 다 잘못했지. 내가 괜히 짜증 낸 거지 뭐. 미안해”


아내는 교회에 갔고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누웠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준비를 하고 교회를 갈까 생각도 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덧 예배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아내가 나가기 전에 이미 잠옷으로 다 갈아입혔고.


밤 인사를 나누면서 한 번 더 사과했다. 나보다 수백 배는 마음이 넓은 자녀들은 흔쾌히 나를 용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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