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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7. 2023

아들과 남편, 그리고 편지

23.05.03(수)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부지런히 준비해서 나가려고 했는데 시윤이가 서윤이와 투닥거렸다. 서윤이가 가방을 하나 메고 있었는데 그게 원래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달라고 하는 게 주된 요지였다. 물론 억지였다. 내가 보기에는. 시윤이가 요즘 그 가방을 썼던 것도 아니고 찾지도 않았고 시윤이에게 맞는 크기도 아니었고, 시윤이는 더 좋은 가방이 있다. 모르는 체하고 그냥 갈까 하다가 그러면 괜히 또 아내에게 힘듦이 전이될까 봐 내가 개입했다.


시윤이가 보이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잘못된 것인지 일러줬다. 말을 하다 보니 너무 엄하게 말하긴 했다. 시윤이는 입을 꾹 닫았다. 출근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나도 여유롭게 기다렸을 텐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시윤이를 충분히 기다려 주거나 마음을 십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졌다. 시윤이는 억울한 것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빠가 모르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닭똥같은 눈물은 뚝뚝 흘렸다. 그러면서도 내가 제시하는 방안대로 따르는 건 싫다는 뜻을 표현했다. 그렇다고 원하는 걸 속시원하게 얘기하는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없었다.


“시윤아. 시윤이가 더이상 얘기하지 않으면 아빠가 마냥 기다려 줄 수는 없어. 아빠는 이제 출근해야 돼. 아빠 가고 나서 더이상 가방 가지고 짜증을 내거나 엄마나 서윤이, 누나한테 소리지르고 그러지 마. 아빠한테 엄청 크게 혼나. 아빠 가고 나서 절대로 그런 말이나 행동하지 마”


어떻게 보면 시윤이의 감정이나 마음보다, 내가 나가고 난 뒤의 아내의 상황에 더 집중했던 것 같다. 나의 부재 상황에 시윤이가 아내를 힘들게 하지 않기 위해 단속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아내에게 연락을 했다. 아내에게 ‘선역’을 부탁했다. 먼저 가서 시윤이 마음도 위로해 주고 토닥여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는 어제 내가 써 준 편지를 일어나자마자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읽었던 순간은 물론이고 하루 종일 그 편지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고 했다. 아마 자녀들과의 일상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힘겹고 버거울 때가 많았겠지만, 편지가 큰 힘이 된 듯했다. 편지의 내용이 큰 몫을 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당신은 너무 좋은 사람이고, 난 언제나 네 편이다’였다. 남편 생활 10년이면 글로도 아내를 사로잡는다.


아내는 저녁에 성경공부 모임이 있었다. 내일부터 3일 동안 전국 처치홈스쿨 캠프가 예정되어 있었고. 3일 간의 짐을 싸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성경공부 모임에 갔다. 어젯밤의 계획은, 오늘 낮에 어느 정도 짐을 싸 놓는 것이었지만 당연히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아내를 대신해서 짐 싸는 일을 주도적으로 맡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점점 쇠퇴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내가 있으니까. 항상 아내가 해 주니까.


“여보. 나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냥 다 때려 넣겠지. 여보 생각하면서 울고”


우스갯소리였지만 진심이었다. 뭔가 짐을 싸는 상황에 아내가 없다면, 아내 생각이 정말 많이 날 것 같다. 밤 늦은 시간까지 차분히 짐을 싸는 아내의 모습이.


소윤이는 처치홈스쿨 캠프를 향한 기대가 무척 크다. 벼룩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의 가격표를 손수 만들었는데 너무 귀여웠다. 포스트잇에 나름대로 책정한 가격과 ‘한 개밖에 없어요’라는 문구를 적기도 했다. 소윤이는 서윤이처럼 존재자체로 아내와 나를 어찌하지 못하게 할 때는 거의 없어졌지만, 이런 순간에 장녀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마냥 어린 자녀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시윤이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기대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아마 기대를 하고 있을 텐데, 기대하는 것만큼 표현하지 않을 거다. 의도하는 게 아니라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 시윤이는 아마도 축구를 가장 기대할 거다. 전국의 처치홈스쿨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모여 축구를 하는 시간이 있는데, 시윤이에게는 그게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서윤이는 뭔가 여행처럼 떠나는 분위기는 감지했지만,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자꾸 ‘캠핑’이라고 표현한다. ‘캠핑’과 ‘캠프’의 차이를 전혀 모른다. 그래도 기대하는 건 마찬가지다. 자기 가방을 꼭 챙겨달라고 하면서 나에게 갖다줬다. 나중에 보니 기저귀와 모기 물렸을 때 바르는 약이 있었다.


시윤이는 잘 때도 울면서 잤다. 잘 때는 소윤이의 인형이 화근이었다. 아침의 상황과 비슷했다. 가방이 인형으로 바뀐 것이었다. 다만, 인형의 소유는 완전히 소윤이였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우리 집에 ‘완전하고 독점적인 소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든 내 것처럼 멋대로 소유를 주장해도 되는 것도 아니다. 시윤이는 마치 후자처럼 억지를 부렸다. 아침과 비슷하게 시윤이의 태도에 관해 이야기했고, 시윤이도 아침과 비슷하게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잘 때 울면서 자게 하는 게 가장 마음에 걸린다. 위로의 표현으로 시윤이 옆에서 자고 싶지만, 내가 코를 고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힘들었다고 해서 그것도 어렵다.


시윤아. 그냥 나중에 이 일기를 읽으면서 ‘아, 아빠가 이런 마음이었구나’ 정도만 알아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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