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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18. 2023

갑자기 KTX 여행으로

23.05.06(토)

오늘도 비가 왔다. ‘혹시나 밖에서 축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수많은 자녀들의 기대와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대신 실내 체육관에서 진행했다. 운동장에서 했으면 동시에 여러 팀도 진행이 가능했을 텐데, 실내에서는 제약이 많았다. 덕분에 팀당 경기 시간이 팍팍 줄었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몸도 풀고 간단한 기초훈련도 했는데, 시윤이는 자기가 잘 못하는 건 아예 시도를 안 했다. 처음에는 몰입해서 하다가 어느 순간 많은 사람이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자각했는지 바로 멈췄다.


“괜찮아. 시윤아. 천천히 하면 돼. 아빠랑 같이 해 보자”

“아이”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가련다’ 유형은 확실히 아니다. 나와 비슷하고 내 아빠와 비슷하다. 경기 때는 열심히 했다(훈련 할 때도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부끄러워 했을 뿐).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윤이도 열심히 했다. 소윤이는 별로 안 좋아해도 열심히 한다. 뭘 먹을 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골고루 잘 먹는다. 의외로(?) 털털하고 무던한 구석이 많다.


“아빠. 저는 샬롬축구가 제일 재미있었는데, 밖에서 못 한 건 제일 아쉬웠어여”


시윤이 뿐만아니라 모든 자녀들의 마음이었을 거다.


오늘은 축구 말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한 뒤 점심을 먹고 끝이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다른 가정과 짝을 지어서 의무적인 교제를 해야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트는 즐거움이 있기도 했지만, 나 같은 내향형 인간에게는 밥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할 말’을 생각해내야 하는 게 쉽지 않기도 했다. 게다가 아이들도 챙기면서 ‘교제를 위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고. 오늘 점심에 교제하기로 한 가정은 어젯밤까지만 있다가 먼저 갔다. 아쉬우면서도 은근한 기쁨이 차올랐다.


‘아, 좀 편히 먹어 볼까’


우리처럼 교제할 가정이 사라진 K네 가족과 함께 앉아서 밥을 먹었다.


엄청 피곤했다. 출발하기 전날의 늦은 취침부터 차곡차곡 누적된 피로가 점점 존재감을 드러냈다. 과연 졸지 않고 무사히 운전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아내는 차라리 자기가 먼저 할 테니, 그때 좀 자 두라고 했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인사하느라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인사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식당에서 인사하고, 지하 1층에서 하고, 1층에서 하고, 주차장에서 하고. 어른이나 아이나 아쉬워서 헤어지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Y네 가족이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근처의 카페에 가기로 했다. 10분 남짓한 거리였는데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난 쪽잠을 잤다. 쪽잠의 위력은 생각보다 크다. 카페 찾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 15분을 잤다. 잠은 15분이었지만, 운전 가능 시간은 1시간 이상 늘어난 기분이었다. 아주 개운했다.


카페 말고는 만날 곳이 없으니 카페에 가긴 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머물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그 카페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제 웬만한 카페는 다 그렇다. 어른은 넷이고 자녀는 여섯이다. 가뜩이나 축구를 원하는 만큼 못해서 몸이 근질근질한 자녀들을 카페에 얌전히 앉혀 놓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아내는 종이 몇 장과 펜을 주면서


“그림 그리면서 놀아”


라고 말했다. 고맙게도 자녀들은 생각보다 얌전했다. 빵과 단호박 우유를 사 주기도 했는데 대세에 큰 변화를 초래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어른들은 제법 대화가 가능했다. 전적으로 자녀들의 공이 컸다. ‘너무 심심하다’는 말에 ‘그럼 끝말잇기를 해 보세요’라고 대답하는 부모들의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줬다.

서로 갈 길이 머니 그렇게 오래 앉아 있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아쉬운 이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Y네가 먼저 주차장을 빠져 나갔고, 우리도 이어서 출발했다. 아내는 기도 제목이 있다면서 전화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쾅!!


“으악. 00야 잠깐만. 내가 조금 이따 전화할게”


사고는 아니었다. 카페 주차장을 나서는데 턱이 있는 걸 못 보고 바로 도로로 진입하다가, 차량 하부가 연석에 부딪혔다. 일반적인 보도블록보다 높았고, 차체에 가해진 충격도 꽤 큰 듯했다. 깜짝 놀라서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차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고 진동이 느껴졌다. 나와 아내가 동시에 느꼈을 만큼 이상한 소음과 진동이었다.


“카센터 들러야 하나”

“그러게. 그게 안전하겠지?”


주말이라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었다. 내 동네도 아니라 아는 곳도 없고(내 동네여도 아는 곳이 많지는 않지만). 몇 군데의 카센터를 거친 끝에 문을 연 한 곳을 발견했다. 바로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 이 상태로는 주행하시면 안 되겠는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그저 ‘부주의한 운전으로 인한 가벼운 사건’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행이 불가능 하다니. 차에는 우리 다섯 식구는 물론이고 수많은 짐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우리 집까지는 거의 300km 였다. 그런데 주행이 운행이 안 된다니. 이성과 감정이 모두 마비되는,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니 감정이 어찌할 일은 당연히 아니었고, 차분히 생각해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 내가 왜 그렇게 막 내려왔을까’


하는 자책을 애써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다. 자책보다 대책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지만 마땅히 대책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 카센터에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보냈나 보다. 이런저런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아내와 내가 내린 결정은 이거였다.


차는 거기 두고 우리(아내와 나, 자녀들)만 간다. 최소한의 짐으로.


사실 아내의 제안과 결정을 전적으로 따랐다. 심각하게 요동친 건 아니었지만 난 아내에 비해 훨씬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왠지 모르게 아내가 나보다는 훨씬 더 옳은 판단을 할 것 같은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우리 가족과 차)는 생이별을 했다.


정말 최소한의 짐만 챙겼다. 아내는 후일을 생각해 옷이라도 좀 챙겨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후일 도모는커녕 당장의 평안이 급했던 나는, 옷도 그냥 집에 있는 걸로 어떻게든 입자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정말 정말 필요한 게 아니면 다 두고 가라고 했다. 소윤이는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어버이날에 아내와 나에게 뭔가를 만들어 줄 때 필요한 재료들과 큐티책이었다. 텀블러도 챙겼다. 시윤이는 그렇게 많이 챙기지는 않았다. 소윤이가 텀블러를 챙겼으니 시윤이에게도 물어 봐야 했다.


“저는 안 챙겨도 괜찮아여”


의외의 반응이었다. 어찌 됐든 조금이라도 가벼우면 좋았다.


택시를 불러서 KTX역까지 타고 갔다. 아내는 애써 침착과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나를 배려하느라 그랬을 가능성도 크다. 난 엄청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은 건 아니었다. 그냥 잔잔한 듯 잔잔하지 않은 침울함이 수시로 나를 덮쳤다. 그에 비해 자녀들은 해맑았다. 뜻하지 않은 KTX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나 보다. 자책으로 인해 우울해진 감정이 자녀들을 향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무던히 애를 썼다. 음주운전을 할까 봐 차를 파는 심정으로, 아예 자리도 따로 앉았다(서윤이는 빼고 네 좌석을 예매했는데, 그게 마침 가족석이었다. 아내와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가 각각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난 출입구 쪽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정식 좌석, 그러니까 편한 자리를 내어주려는 의도였는데 아이들은 몰라도 아내에게도 편한 자리였는지는 의문스럽기는 했다. 간이 좌석이었지만 독립 좌석이기도 한 곳에 앉은 나는 편안하게 잤다. 중간 중간 아내가 너무 힘겹지는 않은지 확인을 하기는 했다.


그래도 KTX에서의 시간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아이들은 정말 여행처럼, 전혀 힘들어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더 신이 난 모습이었다. 아내와 나는 조금씩 지쳐갔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아내도 나도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먹여야 했다. KTX역에 있는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김밥 세 줄과 라면 하나를 시켰다. 난 거의 안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배가 고팠는지 꽤 잘 먹었다. 아내는 생존을 위해 먹었다.


KTX역에서 집까지는 리무진 버스를 타야 했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꽤 오래 걸렸다. KTX를 탄 시간이나 버스를 탄 시간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자녀들도 한계에 다다랐는지 졸려서 정신을 못 차렸다. 아내는 세 자녀를 깨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버스에 내려서 조금 걸어야 하는데 잠들었다가 깨면 걷는 것도 힘들어 할 테니 잠들지 않게 하려고 갖은 수를 동원했다. 아내의 노력 덕분에 아무도 잠들지는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K가 차를 가지고 왔다. 걸어서도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라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결국 나왔다. 차로 3분, 걸어서 10분의 짧은 거리였는데 막상 차에 타니 편하긴 무지하게 편했다. 새삼스레 K가 고마웠다.


길고 긴 귀가 여정을 드디어 마쳤다. 아이들은 한계에 다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나친 듯했다. 손만 씻으라고 했다. 양치며 세수며 다 생략이었다. 옷만 갈아입히고 바로 눕혔다.


“그래도 무사히 올 수 있어서 감사하다”


라는 말도 진심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감사한 마음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후회, 자책, (주인 없는) 원망의 마음이 복잡하게 요동쳤다. 뭐랄까. 엄청 깊은 동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냥 해맑게 밝기도 어려웠다.


“여보. 난 괜찮아. 어차피 우리 힘으로 어떻게 안 되잖아 이제. 그냥 믿고 기다려야지”

“어, 그래”


“여보. 그래도 이렇게 여기까지 온 게 얼마나 감사해”

“어, 그래”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는 아내의 말에 나의 대답이 몇 번이나 비슷하게 반복됐다. 언어는 물론이고 분위기와 태도까지. 신이 나기 어려운 밤이었는데, K가 아까 전해 준 병천순대를 한 입 먹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한심하게도 순대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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