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깨아빠 Dec 19. 2023

여보, 각오해

23.05.07(주일)

#여보, 각오해

##D+2984, D+2202, D+1129 - 23.05.07(주일)


엄청 피곤했다. 자고 일어난 그 순간부터 피곤했다. 무슨 수를 써도 들기 어려운 무게의 바벨을 꽂은 역기 같은 무게의 피로감이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아내도 그런 것 같았고, 심지어는 자녀들도 비슷해 보였다. 자녀들은 애써 괜찮다고 부정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 비슷했다. 당연한 일이다. 모두 똑같은 과정을 겪었으니까.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겸해 모든 교인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 11시 예배를 드리고 난 뒤에는 아무런 일정이 없었다. 우리 가족 자체로도 일정이 없었고 즉흥적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일단 집에 가서 좀 쉬어야 했다. 모두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건, 잠을 자면서 얻는 쉼과 충전이었다.


“얘들아. 집에 가면 다들 한 숨 자자”


사실 아내와 내가 가장 간절히 원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당연히 싫다고 했지만, 피곤 앞에 장사가 없다. 피곤하면 잘 거라고 생각했고, 다들 엄청 피곤해 보였다. 나만큼이나. 집에 오자마자 아무것도 안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아내와 아이들은 작은방에 누웠다.


난 거의 눕자마자 잠들었고 혼자 안방에 있었기 때문에 작은방의 상황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일어났을 때 엄청 개운했다. 시간을 보니, 대략 3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꿈도 안 꾸고, 중간에 깨지도 않고 엄청 달콤하게 3시간을 잔 거다. 아내와 아이들도 꽤 오랜 시간을 푹 잔 듯했다. 시윤이만 빼고. 시윤이는 계속 잠들지 못하다가 아내가 옆에 가서 누우니까 그제야 잠들었다고 했다. 사실 아내와 나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여보. 애들 아플 거 같은데?”

“그러니까. 너무 피곤한 일정이었다”


아내는 시내에 나갔다 오자고 했다. 오늘 밤에 형님(아내 오빠)네 식구가 오기로 했는데, 어린이날 기념으로 조카에게 선물 할 옷을 보러 가자는 말이었다. 좋은 제안이었다. 그냥 바람이 쐬고 싶었다. 꼭 피부로 맞는 바람이 아니더라도, 집안의 공기가 아닌 집 밖의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자녀들도 상태가 괜찮았다. 어찌 됐든 낮잠을 자고 일어났기 때문에 다들 개운했을 거다. 나처럼.


백화점으로 가서 짧게 쇼핑, 아니 사려고 했던 걸 사고 지하 식품 매장으로 갔다. 집에서 나올 때 주먹밥을 싸 왔다. 아이들 저녁이었다. 아내와 나는 몇 개만 집어먹었다. 밤 식빵도 조금 먹었다. 나의 자녀들은 어디서 무엇을 먹든 참 잘 먹는다. 별 거 없는 주먹밥도 어찌나 맛있게 잘 먹는지. 아내와 나는 밥은 대충 먹었지만, 커피는 챙겨 마셨다. 사실 집에서 나올 때


“그래 나갔다 오지 뭐. 살 것도 사고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라고 얘기했다. 주요한 목적 중에 하나였던 셈이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은 문을 닫아서 아쉬운 대로 ‘덜 맛있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샀다.


모두 거하게 낮잠을 자서, 특히 시윤이는 해가 질 무렵에 자서 누워도 잠이 안 올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진행했다. 잠이 안 들더라도 누워서 쉬는 것과 깨어서 무언가를 하는 건 또 다르니까. 그리고 아내와 나에게도 퇴근은 필요하니까. 역시나 자녀들은 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형님네 가족은 자정이 다 돼서 왔다. 그때는 세 녀석 모두 자고 있었는데, 소윤이는 잠깐 깨서 나왔다. 형님네 부부는 소윤이를 보더니


“왜 이렇게 컸어. 너무 컸다”


라며 놀랐다. 1월에 보고 왔으니 4개월 만이었는데 그 사이에도 부쩍 컸나 보다. 자다가 나와서 유독 어린이의 느낌이 안 났을지도 모르고.


“여보. 애들 아프겠지?”

“응. 각오해야 돼”


아내와 아이들, 형님네 가족은 내일 꽤 먼 곳으로 놀러 간다고 했다. 평소였으면 한 이틀 동안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쉬는 데 집중했을 텐데 손님이 왔으니, 그것도 그냥 손님이 아니라 삼촌과 숙모가 왔으니 계속 놀아야 했다. 아픔을 각오하고서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갑자기 KTX 여행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