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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1. 2023

아들을 떠나 보내는 심정으로

23.05.11(목)

“아침부터 쉽지 않네. 소윤이는 느닷없이 채식베이킹 책 가져와서 대체 언제 만들 거냐고 따지고. 맨날 나중에냐며. 후…”


오전에 워낙 바빠서 제대로 답장도 못했지만, 아내의 깊은 인내가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소윤이도 평소와 다르게 다소 짜증스러웠나 보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맨날 나중에냐’라는 소윤이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된다. 안타깝게도 제3자의 입장일 때 시야가 넓어지고, 당사자가 되면 아예 안 보인다. 대국에 앉으면 안 보이고 곁에 서서 보면 훈수거리가 넘쳐난다는 말이 육아에도 찰떡같이 맞는 말이다. 아내나 나나 ‘나중에’라는 말을 그 어떤 말보다 많이 하기는 한다. 항상 미안하기도 하고 미뤄뒀던 수많은 ‘나중에’를 선제적으로 꺼내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저렇게 먼저 후벼파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기도 하다. 아내 정도면 준수한 거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에는 먼 길을 떠나야 했다. 지난 처치홈스쿨 캠프 때 먼 타지에 두고 온 차를 찾으러 가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KTX 역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다. 평소였어도 아내와 아이들(특히 아내)의 시간과 노력을 빼앗는 것 같아서 미안했을 텐데, 오늘은 더 걱정이 됐다. 다행히 세 남매 모두 멀쩡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말끔하게 정상은 아니었다. 아직은 집에서 잘 쉬는 게 필요해 보였는데, 버스를 타면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리니까 어쩔 수 없이 부탁했다.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 모두 증상은 남아 있었지만 몸 상태는 괜찮다고 했다.


아내는 점심도 싸 왔다. 주먹밥이었다. 난 배가 고파서 가는 길에 차에서 먼저 먹었다. 아이들은 KTX 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먹었다. 대낮에 세 자녀와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나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멀고 길게 출장을 떠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뭐 사실은 아무도 관심이 없었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하긴, 경우에 따라서는 예상보다 긴 이별이 될 각오도 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차가 완전히 퍼진다거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여보. 졸다가 지나치지 말고. 알았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아내는 마치 아들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자기 없이 홀로 떠나보내는 남편이 영 불안했나 보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전화도 해 줬다. 일 때문에 전화가 많이 와서 어차피 자고 있지는 않았지만.


차는 아직 고친 게 아니었다. 80km를 준수하며 정속주행으로 와야 했다. 덕분에 처음 내비게이션이 알려 준 도착예상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늘어났다.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으니까 꽤 먼 거리였다. 아내나 아이들 없이 혼자 그렇게 장거리 운전을 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심심하고 허전했다. 잠깐 휴게소에 들렀을 때, 아이들 내려주느라 뒷문 열어주고, 카시트 벨트 풀어주고, 오고 가는 차에 치이지 않도록 신경 쓰고 하는 일을 안 해도 되니까 매우 편하고 홀가분 했지만, 너무 허전했다. 역시나 힘들고 신경이 쓰여도 함께 있는 게 백 배, 천 배 더 좋다.


집에 도착했을 때, 자녀들은 아직 안 자고 있었다. 아주 가끔은, 늦게까지 일을 하고 왔을 때 아이들이 모두 자고 있으면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내에게 감사할 때도 있다. 오늘은 아니었다. 무척 보고 싶었다. 고작 반의 반 나절 정도 못 본 거였지만, 내 몸과 마음의 고생이 꽤나 혹독했다. 아내와 아이들 생각이 많이 났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 고생을 감당하지도 않았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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