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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1. 2023

공감이 조금 부족한 아빠

23.05.13(토)

안타깝게도 비가 왔다. 뭐 이렇게 주말마다 비가 오는지. 시윤이는 이번 주에도 아빠와 함께 하는 축구를 기다렸는데 물거품이 됐다. 오후에는 비가 그친다는 예보가 있기는 했지만 어떻게 될 지는 모르니까. 더군다나 아내가 오전부터 교회에 가서 내일 점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비가 안 왔으면 아내와 함께 점심을 준비하는 가정의 아빠와 자녀들과 함께 운동장에 갈까 싶었는데, 그것도 무산됐다.


축구를 하고 왔더니 아이들은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내는 아직 옷도 못 갈아입고 씻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나가기 위한 준비는 0.1%도 진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오고 나서야 머리도 감고 준비를 시작했다. 나도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바깥에서 아내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확실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소윤이나 시윤이, 혹은 서윤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자잘한 다툼과 갈등 때문인 듯했다.


아내는 곧 나갔고, 나와 자녀들이 시간이 시작됐다. 일단 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날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바로 보드게임을 하자고 했는데, 내가 조금만 쉬었다가 하자고 양해를 구했다.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뛰고 와서 배까지 채우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어디라도 누우면 바로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눕거나 소파에 앉지 않고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편한 곳 중에 가장 불편한 곳이었달까.


적당히 쉬고 거실 바닥으로 내려가서 아이들과 함께 보드게임을 시작했다. 서윤이는 자기도 하겠다고 했는데, 서윤이가 할 만한 건 아니었다. 몇 개의 게임은 서윤이를 껴 줘도 진행에 큰 무리가 없지만, 오늘 처음 했던 게임은 서윤이를 껴 주기가 어려웠다. 대신 내 무릎에 앉혀서 나의 아바타 역할이라도 하게 했다. 눈치와 감각이 뛰어난 서윤이는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금방 깨닫고는 곧 흥미를 잃었다. 사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나를 기다리면서 보드게임을 몇 판 할 때는 이렇게 얘기했었다.


“얘들아. 서윤이도 같이 할 방법을 찾아봐야지”

“아빠. 근데 이건 서윤이가 같이 하기가 어려워여”

“그래도. 동생도 어떻게든 같이 하게 해 줘야지”


막상 내가 해 보니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시 사람은 역지사지의 공감능력을 갖춰야 한다.


여러 개의 보드게임을 여러 판 했다. 흥미를 잃은 서윤이는 자기가 먼저 졸리다고 하면서 자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낮잠은 내가 자고 싶었다. 마지막 즈음에는 나도 보드게임을 하면서 졸았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미안할 정도로 많이 졸았다. 서윤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보드게임도 하나 하고 자자고 했다. 사실 그것도 서윤이가 규칙을 지켜서 하지는 못한다. 서윤이가 규칙을 지켜서 할 수 있는 게임은 아직 없다. 그래도 그냥 다들 서윤이의 기분을 맞춰주며 접대용(?) 게임을 한 판 했다.


“아빠. 아빠도 서윤이 재우면서 잘 거예여?”

“아니. 나와야지”


진심이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평소에 서윤이가 자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서윤이는 금방 잠들었다. 당연히 나도 그만큼 금방 잠들었고. 대신 많이 자지는 않았다. 얼마 안 돼서 소윤이와 시윤이가 안방에 들어왔고, 그 소리에 깼다.


“어, 소윤아. 시윤아. 왜?”

“그냥여”


그냥이 아니었다. 자는 아빠를 깨우겠다는 확고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아빠가 자는지 확인도 하고 자고 있으면 혹시나 자기들이 내는 기척에 깨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다. 아이들의 바람대로 난 깼고, 바로 일어나서 나왔다. 나와서 바로 소파에 누워서 덜 깬 잠을 붙잡을까 하다가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미안해서 눕지는 않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방에서 각자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었다. 난 소파에 앉아서 요즘 소윤이와 시윤이가 재밌게 읽는 ‘시튼 동물기’를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딱히 할 게 없어서 시작했는데, 영 재미가 없었다. 금세 졸기 시작했고 앉아 있던 내 몸은 어느새 침대와 수평으로 접촉하고 있었다.


아내는 점심도 먹고 오후의 한복판 즈음에 왔다. 바깥을 보니 비가 그친 듯했다. 일기예보에도 비가 내리지 않는 걸로 되어 있었고.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기로 했다. 시윤이는 축구를 하고, 소윤이는 인라인스케이트, 서윤이는 킥보드를 타기로 했다. 인라인스케이트와 킥보드는 카센터에 맡긴 차에 있어서 카센터에 들러서 꺼내 왔다.


운동장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날씨도 괜찮았다. 맑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해가 없어서 선선했다. 시윤이는 바로 축구화로 갈아 신고 공을 차기 시작했고, 소윤이도 인라인스케이트로 갈아 신었다. 소윤이와 서윤이는 아내가 맡았고(?), 난 시윤이와 함께 공을 찼다. 아내와 소윤이, 서윤이는 운동장을 크게 돌았다. 두어 바퀴 쯤 돌고 나서 나와 시윤이가 는 곳으로 오는데 소윤이 표정이 울상이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아내는 나에게 눈짓으로 무언가를 얘기했다.


‘몰라. 속상한가 봐’


대충 이런 의미인 듯했다. 아내가 더 가까워졌을 때 슬쩍 물어봤더니, 소윤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고여 있던 물에 바지가 젖었다. 그냥 젖은 게 아니라 약간 물이 들기도 했고. 소윤이는 그게 속상하다고 했다. 속상한 거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속상하니까 집에 가자고 했다. 나에게 얘기한 건 아니었고 아내에게 그렇게 얘기했다고 했다. 여기서 내가 조금 더 다정하고 차분하게 소윤이의 감정을 공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또 그러지 못했다. 사실 소윤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겠다고 할 때, 이미 얘기를 해 줬다. 비가 온 뒤라 바닥이 젖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한 거다. ‘네가 괜찮다고 해서 탄 거고, 이런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집에 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면 어떻게 하냐’면서 소윤이에게 오히려 뭐라고 했다. 다행히 아내가 소윤이의 위로자 역할을 하고 있기는 했다. 소윤이는 한참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난 계속 시윤이와 축구를 했다. 한 번씩 킥보드 타는 서윤이를 따라서 운동장을 돌기도 했다. 소윤이도 나중에는 기분이 풀리기는 했다.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막 자리를 정리하려고 하니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저녁으로는 주먹밥을 싸 왔다. 아마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운동장에서 먹었을 텐데 비가 와서 그러기가 어려웠다. 아내가 장을 보러 가야 한다고 해서 이동하는 동안 차에서 먹으라고 했다. 아이들이 뭔가를 차에서 먹겠다고 하면


“차에서 먹으면 안 되지”


라고 말 할 때가 많다. 막상 우리(아내와 나)가 아쉬울 때는


“괜찮아. 어쩔 수 없지”


라고 하고. 얘들아, 미안.


엄청 피곤했다. 아내도 나도. 아내와 나는 애들을 재우고 저녁을 먹었다. 아내가 아이들을 씻기는 동안 대패삼겹살을 엄청 정성스럽게 구웠다. 정말 심혈을 기울였다. 피곤한 나의 몸과 마음에 큰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마늘도, 대파도, 미나리도, 김치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삼겹살의 기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매우 신경을 쓰면서 구웠다. 아이들을 모두 눕히고, 아내와 나 둘이 식탁에 앉았다. 나의 정성스러운 ‘구움’ 때문인지, 모든 일과를 마치고 맞이한 홀가분함 때문인지, 자녀들 없이 아내와 둘이 마주 앉은 오붓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충분했다. 아내와 나의 피곤을 잠시 잊게 만들기에 충분하고 훌륭한 저녁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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