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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3. 2023

재미는 있는데 엄청 정신없네

23.05.14(주일)

빌라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보통 내가 나가지만, 오늘은 아내가 나갔다. 어제 자기 전부터 아내에게 압박을 줬다.


“아, 내일은 여보가 나가”

“진짜? 진짜 내가 나가?”

“응. 여보가 나가”


안 나가면 벌금이 만 원이다. 무시하자면 무시할 수 있는 돈이지만, 이럴 때마다 (내)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소리가 떠오른다.


“땅을 파 봐라. 백 원이라도 나오나”


아무튼 아내가 나갔다. 아내의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덩달아 잠이 깨기도 했고, 이미 그전부터 아내와 나의 사이를 파고든 서윤이 때문에 진작에 잠이 달아나기도 했다. 잠이 조금 깼어도 완전히 정신을 차려서 밖으로 나가는 것과 몽롱함을 유지하고 이불 속에 머무는 건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더 깊이 자지는 못했지만 행복했다.


보통 청소는 20분이면 끝이 난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내가 한 시간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잠결이라 한 시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운 건 아니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내가 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보니 아직도 청소를 하고 있다고 했다. 평소(내가 나갔던 날)에 비해 유독 청소거리가 많았을 리는 없었고, 아내가 얘기해 주는 정황을 들어 보니 반장 아주머니를 위시한 몇 사람의 ‘꼼꼼함’이 발동되어 유발된 일이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적당히’ 보다는 ‘꼼꼼히’를 추구하는 아내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아무튼 아내는 무려 한 시간이나 청소를 하고 돌아왔다.


아내는 혼자 1부 예배를 드리러 갔다. 식당 봉사를 하려면 예배 중간에 나가야 하니까 미리 예배를 드린 거다. 아내가 애들 입을 옷도 다 골라주고 나가서 별로 바쁘지는 않았다. 다만 오늘이 스승의 주일이라는 걸 나가기 직전에 깨달았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전도사님, 선생님에게 간단하게 편지라도 쓰는 게 어떠냐고 얘기했다. 소윤이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시윤이도 마찬가지였지만 ‘뭐라고 써야 할 지 모르겠다’라면서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소윤이는 그 짧은 시간에도 여러 개의 편지를 후다닥 썼다. 나름대로 꾸미기까지 하면서.


오전 예배를 드리고, 오후 예배도 드리고, 목장모임까지 하고 처치홈스쿨 식구들과 함께 축제에 갔다. 지역 축제였는데 K가 관련된 일을 하고 있기도 했고, 축제를 핑계로 다 함께 나들이도 할 겸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기대가 엄청 컸다. 왜 그렇게, 뭘 그렇게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번에 축제에 갈 건지, 가면 언제 갈 건지를 쉴 틈 없이 물어봤다.


막상 특별한 건 없다. 어느 축제에 가도 비슷하듯, 여러 개의 부스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어디선가 음악소리도 들리고, 먹거리도 많고. 축제 자체가 주는 활기가 사람을 좀 들뜨게 하는 면이 있기도 하고, 오늘은 날씨도 참 좋았다. 바람이 좀 불기는 했지만 해도 워낙 뜨거워서 조화로웠다. 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신이 나는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축제를 기대한 게 아닐까 싶다.


슬슬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난 뒤에 저녁을 먹었다. 축제에서 파는 음식을 사다 먹었다. 정말 정신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시끄럽기가 중장비 여러 대가 돌아가는 공사장 이상이었다. 혼자 앉아서 먹어도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곳에서 자녀들 열 명을 챙기려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엄마들이 음식을 사다 주면 아빠들이 자녀들을 챙겨서 먹였다. 아빠들도 같이 먹으면 됐는데 난 그럴 정신이 없었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챙겨주면서도 잘 먹는데 오늘은 식욕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사실 자녀들도 제대로 먹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도 K의 첫째와 소윤이가 가장 잘(갖춰서, 제대로) 먹었다.


“이제 배불러여”


배부름을 느낄 정도로 많이 먹었다. 그에 비해 시윤이나 더 어린 자녀들은 아마 제대로 먹기 어려웠을 거다. 그럴 만한 음식이 많지 않기도 했고. 어찌 됐든 자녀들이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조금씩 식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슬렁슬렁 구경도 하고, 간식도 사 먹고, 일반인들이 참가한 노래 대회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녀들은 어른들 주변에서 뛰기도 하고 인조잔디 바닥에 있는 조그만 알갱이를 모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꽤 늦은 시간까지 머물렀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눕히고 난 뒤에, 그러니까 퇴근 후의 여유를 느끼기 시작할 때 쯤 아내가 얘기했다.


“아, 요거트 먹고 싶다”


냉장고에 있는 요거트를 먹고 싶다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요거트가 없었다. 어디선가 팔고 있을 요거트를 사 와서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사다 줘?”

“응”


모바일 결제할 때 스마트폰 얼굴인식 정도의 반응속도였다. 생각과 고민의 틈을 허용하지 않는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아내를 위해 기꺼이 요거트를 사다 줬다. 아내는 한 주먹 정도 되는 작은 요거트를 먹으며 행복하게 주말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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