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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3. 2023

사바나 초원의 초식동물

23.05.18(목)

소윤이가 피아노를 배워야 해서, 아내와 아이들은 오늘도 교회에 있었다. 나와 K는 오전 일정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교회에 갔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먹고 싸 온 짜장이 오늘의 점심이었다. 주중에도 두어 번 더 먹었지만, 지겹지는 않았다.


소윤이가 피아노를 배우는 동안 시윤이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전의 시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일단 내가 갔을 때는 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시윤이도 혼자 앉아서 열심히 산수 문제를 풀고 있었다. 아내의 전언에 따르면, 시윤이의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독려와 칭찬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공을 들여도 허망한 반응이 나올 때도 적지 않았고. 아무튼 오늘은 괜찮아 보였다. 오늘 뭘 하고 있었는지 얘기하는 시윤이의 말에, 나도 적극적인 호응과 칭찬으로 화답했다. 소윤이도 아직까지는 지겹지 않고 재밌다고 했다. 부디 이 흥미와 열정을 끝까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와 아이들도 점심을 먹고 나서는 집으로 갔다. 아직 차가 한 대 뿐이고 오후에는 내가 차를 써야 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줘야 했다. K와 동네 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남은 일정을 하러 가기로 했다. 카페에 가는 김에 아내 커피도 한 잔 샀다.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바래다 주고 다시 카페로 왔는데 얼마 뒤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슬픈 소식이 있네”


진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


“뭐? 왜?”

“나 커피를 차에 두고 내렸나 보네”

“아, 진짜?”

“여보가 이따 다른 데 갈 때 집에 들러서 주고 갈 수 있어요?”

“어, 알았어”


두 시간 정도 있다가 아내에게 전달했다. 그래도 차가운 커피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직 온기도 남아 있었다.


아내는 목이 아프다고 했다. 어제부터 살살 아프기 시작했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더 심해졌다. 원래 새벽기도도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목이 많이 아파서 다시 잤다고 했다. 다행히 다른 증상이 더 심해지지는 않았다. 열도 없었고 몸살 기운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목이 많이 아프고 기운이 조금 없다고 했다.


“그냥 계속 누워 있고 싶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아파도 아예 누울 생각을 못하지만, 아내처럼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누울 수 있다. 대신 사바나 초원의 초식동물 체험이 가능하다. 눕자마자 먹잇감을 향해 몰려드는 포식자들을 버텨내야 하는데, 대체로 버텨내지 못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물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일어나게 만든다. 그러면 흩어진다. 그나마 서윤이 재우는 시간이 합법적(?)으로 잠시나마 눈을 붙일 시간인데 당연히 그렇게 길지는 않다. 아주 가끔씩, 아이들이 무언가에 몰입하면 잠시 아내를 잊게 되고, 그럴 때는 조금 길게 자기도 하지만.


일을 마치고 한살림에 들렀다. 몸이 좋지 않은 아내에게 쌍화탕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간 김에 아내에게 혹시 사 갈 게 있는지 물어봤는데, 아내가 이것저것 많이 얘기했다. 아내가 얘기한 것들을 사서 퇴근했다. 아내는 계속 안 좋았다. 많이 누워 있기는 했지만 쉰 게 아니었다. 그저 누워 있을 뿐이었다.


저녁에는 집 근처 중국음식점에 갔다. 탕수육이 지겹다고 했던 시윤이가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했다. 권태기가 끝났나 보다. 기운이 없고, 목이 아프기는 했지만 아예 몸살이 난 것도 아닌 아내도 갈 수 있겠다고 했다. 아내가 몸이 너무 안 좋으면 내가 혼자 애들 셋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한 만큼 배불리 먹으라고 큰 걸 주문했다. 주문한 탕수육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양이 너무 많았다. 처음에 주문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탕수육 대 자로 하나 주세요”


라고 했는데,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덕분에 속도 조절하지 않고 마음껏 먹었다. 내가. 탕수육은 시윤이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가장 큰 수혜자가 됐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집에 와서 아이들이 잘 준비를 할 때 너무 피곤했다. 아무리 피곤했어도 거실에 누우면 안 됐다.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 기운이 없는 아내가 아이들도 씻기고 옷도 갈아입혔다. 난 거실 바닥에 누워서 자는 듯 아닌 듯 헤롱댔다. 그러다 잠결에 괜히 자녀들에게 짜증도 냈다. 왜 이렇게 잘 준비가 더디냐고 잔소리를 했는데, 아내가 조심스럽게 ‘그래도 다들 부지런히 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특히 소윤이에게 실수를 많이 했다.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너무 감정적으로 꾸짖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미안해졌다.


자녀들을 방에 눕히고 운동을 하러 다녀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새콤달콤 세 개를 샀다. 짧은 쪽지 세 개를 써서 새콤달콤에 붙였다. 내용은 당연히 ‘아까 너무 짜증 내면서 말해서 미안하다’였다. 아이들 책상 위에 하나씩 놨다. 쪽지를 쓰면서도 부끄러웠다. 시윤이에게 그렇게 짜증 내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하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아직은 새콤달콤과 쪽지 하나로 만회할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의 마음이 넓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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