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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3. 2023

아내가 나아졌다는 증거

23.05.20(토)

아내는 오늘 아침에도 썩 나아지지 않았다. 며칠째 비슷하다. 나아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다. 계속 기운이 없었다. 처치홈스쿨 모임이 있어서 교회에 가야 했는데 아무래도 아내는 집에서 쉬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고. 갑자기 교회에 안 간다고 하면 아이들의 실망감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크기도 했을 거고, 아무리 내가 있어도 자녀 셋이 함께 있으면 아내가 완전히 쉬기도 어렵기 때문에 아내만 혼자 집에 있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아예 생각을 안 했다. 아내가 혼자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기운도, 간단히 먹을 만한 무언가도 없다는 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여보. 갔다 올게. 좀 쉬어”


원래 아내가 예배 인도를 하는 순서였다. 아침에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부탁하기 어려우니 내가 아내를 대신하기로 했다. 그래도 아내가 모든 순서와 내용을 다 준비해 놔서 그걸 잘 전달하기만 하면 됐다. 물론 그것도 매우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회 마당 한 쪽에 있는 텃밭에 가서 상추를 땄다. 겨울에 상추, 깻잎, 감자, 방울토마토, 바질 등을 심었는데 심을 때도 대충 심고, 중간에도 열심히 관리를 하지 않았더니 무질서하게 무성해졌다. 다른 건 아직 수확할 단계가 아니었지만 상추는 좀 따야 했다. 자녀들과 함께 가서 상추를 땄는데, 아주 잠깐이었다. 소쿠리 하나에 가득 차도록 땄는데 여전히 빽빽했다. 텃밭 활동의 백미는 ‘노동과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아주 즐거운 체험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비슷할 거다.


점심도 상추를 활용한 음식을 만들어서 함께 먹었다. 다른 엄마 선생님들이 무나물, 콩나물볶음 무생채를 만들었다. 계란프라이도 부쳐서 상추를 넣고 비빔밥을 만들었다. 밥이 안 보이도록 상추를 가득 가득 넣었는데도 여전히 잔뜩 남았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야채를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하는 소윤이와 시윤이는 상추를 더 받아 가며 잘 먹었다. 서윤이가 가장 야채를 안 좋아한다. 서윤이도 조금 더 크면 나아질는지는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어린 자녀들은 재우고 큰 자녀들은 자기들끼리 놀게 하고 부모들은 나눔(대화)을 하는 게 계획이었다. 상추 따고 점심 만들어서 먹고 설거지까지 하고 나니 예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게다가 부모들의 은근한 피로감도 있었다. 엄청 빡빡한 일정은 아니었지만, 꽉 찬 오후에 찾아오는 나른함이랄까. 나눔 시간은 생략했다.


거기서 일정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헤어질까 하다가 교회 근처 대학교 운동장에 가기로 했다. 날씨가 좋으니 그냥 집에 가는 게 아쉽기도 했고, 자녀들도 바로 헤어지기 싫다고 했다. 운동장에 가서 꽤 오래 있었다.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간식도 먹고. 아빠들끼리 족구도 하고. 그러다 또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간식도 먹고. 새벽부터 축구를 하러 다녀와서 피곤할 법도 했지만, 사실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재밌었다. 밖에서 운동하며 놀 때는 별로 힘들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내가 없는 게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다행히 아내는 조금 나아진 듯했다.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너무 무료하고 쓸쓸하다고 했다. 힘들기는 해도 아이들과 복작복작 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다음 주 월요일이 되면 뱉기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잠시라도 이별이 필요하고, 멀어짐이 필요한 거다. 떨어지니 그리움이라는 것도 느끼고.


소윤이는 서점에 가자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뜬 지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어린이날 선물로 사 달라고 해서 주문해 놨던 ‘나니아 연대기’가 서점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온 거다. 소윤이는 ‘혹시 오늘 시간이 되면 저녁에라도 갈 수 있냐’라고 계속 물어봤다. 너무 간절하면서도 공손해서 웬만큼 늦지 않으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나니 고민스러운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낮잠을 자지 않은 서윤이는 아내와 함께 집에 있으라고 하고 소윤이와 시윤이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여보. 나도 같이 가자”

“아, 그럴래? 괜찮겠어?”

“어. 바람도 좀 쐬고”

“하긴 답답하지?”


몸이 조금 나아진 건 분명해 보였다. 답답함을 느끼고 밖에 나가자는 얘기도 하고. 평소에 비하면 누웠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에 집에서 나왔다. 책만 사서 바로 오지는 않았다. 잠깐 구경도 하고 커피도 사고 빵도 사서 왔다.


“여보. 낫기는 했나 보다. 빵을 찾는 걸 보니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더 괜찮아 보였다. 크로와상을 토마호크를 뜯는 것처럼 베어 무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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