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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5. 2023

선택적 피로

23.05.21(주일)

오랜만에 일정을 꽉꽉 채운 주일을 보냈다. 첫 예배 드리고,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드리고, 목장 모임 하고, 성경공부까지. 성경공부를 하는 구성원이 처치홈스쿨 아빠들이라, 보통 엄마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먼저 귀가를 하는데 오늘은 다 기다리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 바람이 선선했고. 좋은 날씨는 나들이를 부른다. 자녀들의 ‘어디라도 가면 안 되냐’는 요청을 어른들이 강력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건, 어른들의 마음속에도 ‘귀가 대신 나들이’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른들의 의사를 물어보는 자녀들의 물음에, 못 이기는 척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종종 가는,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고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로 갔다. 샌드위치 가게는 문을 닫았고, 대신 어느 국수 가게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아니, 사실 사람이 엄청 많았다기 보다는 가게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적었다. 사장님 부부 두 분 뿐이었다. 엄마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아빠들은 자녀들과 함께 놀이터에 있었다. 얼마 안 돼서 엄마들에게 연락이 왔다. 그냥 다 함께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가 보니까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줄이 꽤 길었다. 아내들끼리 서 있었을 때는 세 명이었는데 우리가 가니까 순식간에 열 네 명이 됐다. 우리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이 적잖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죄송할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죄송스러웠다.


꽤 한참 기다려서 자리에 앉았다. 자리가 나는 대로 가족별로 떨어져서 앉았다. 다른 손님들이 먹는 걸 보니 양이 많아 보이길래 세 개만 시켰다(아이들이 잘 먹는 날에는, 어디를 가든 세 개가 부족할 때도 많다). 오늘은 세 개로도 배가 충분히 불렀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생각보다 많이 먹지 않았다. 아빠들의 성경공부가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삶은 계란을 먹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배가 많이 고프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적게 먹은 건 아니고, 그냥 밥으로 치면 딱 한 공기 정도 먹은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눈으로 담기는 풍경도, 피부로 느껴지는 시원함도. ‘아, 너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들 비슷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들꽃도 꺾고, 풀도 꺾는 자녀들을 보는 부모들의 얼굴에서 ‘너그러움’이 느껴졌다.


자녀들의 최종 목적지는 놀이터였다. 아빠들은 자녀들과 함께 있었고, 엄마들이 놀이터 옆에 있는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갔다. 엄마들은 함흥차사였다. 슬쩍 보니 카페 앞 야외 자리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럴 만한 날씨와 분위기였다. 카페 앞에 앉은 엄마들이 훨씬 좋았겠지만, 자녀들과 함께 있던 나도 충분히 좋았다.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씨였달까. 아내가 중간에 커피를 갔다 줬는데 얼음이 거의 다 녹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엄마들은 한참을 더 거기 있다가 왔다.


즐거운 시간 뒤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집에 돌아오니 역시나 피로가 몰아쳤다. 


“얘들아. 들어가서 얼른 씻고 나와”


거의 항상 집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몸을 던지며 저렇게 얘기한다. 아이들이 자러 들어가고 나면 소멸되던 힘과 체력이 다시 샘 솟으며 고요한 밤의 시간이 시작되고. 오늘은 아내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거의 세 시가 다 돼서 누웠다. 매일 느끼지만, 선택적 피로의 발현이랄까. 아내와 대화를 나눌 때는 하나도 안 피곤한데, 아이들 재우기 전까지는 왜 그렇게 피곤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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