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11(화)
아침부터 둘이 동시에 일어나 거실로 쪼르르 나갔다. 둘이 잘 노는가 싶더니 소윤이가 먼저 방에 들어와 나랑 아내를 깨우려고 시도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자 이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자기 누나 따라서 들어온 시윤이도
"엄마, 엄마"
를 외쳐대며 깨워보지만 마찬가지였다. 물론 난 정신은 깬 상태였다. 아마 아내도 그랬을 거다. 비록 자지는 못할지언정 누워 있는 것도 감지덕지라는 심정으로 최대한 버텨 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다. 둘이 거실에서 세상모르고 놀고 있길래 살금살금 화장실로 잠입했다 . 불도 켜지 않고 감에 의지해 일을 보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고 참음이 크면 소리가 크다고 했던가. 귀 밝은 소윤이가 재깍 달려와서는
"아빠! 뭐 해요?"
라며 물었다.
"응, 아빠 화장실 왔지"
"왜요? 오줌 싸요? 똥 싸요?"
"응, 쉬 하는 거야"
시윤이도 쫓아와가지고는
"암마아, 암마아"
엄마 아니라고 시윤아, 아빠라고 아빠. 일 다 보고 다시 방에 들어가려는데 소윤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아, 다시 들어가지 마, 나랑 놀아아앙"
"소윤아, 아빠 너무 졸려서 그래, 아빠가 지금 못 자면 이따가 회사에 가서 일을 못 해"
"아아아아, 그래도 싫어"
"소윤아, 아빠 잠 못 자서 아프면 어떻게 해, 잠 많이 자고 건강해야 소윤이랑 많이 놀지"
비겁하기 짝이 없다. 잠 많이 자고 싶으면 밤에 일찍 자면 될 것을. 어쨌든 건강 이상설을 들이밀자 소윤이도 겁먹었는지 꼭 잡았던 손을 풀어줬다. 그래 봐야 한 10-20분 더 누워 있었다. 아내는 오늘도 오전부터 두 녀석과 함께 놀이터에 나갔다. 시윤이가 계단에서 굴렀다며 카톡을 보내왔다. 일단 전화가 아닌 카톡으로 알린 걸 보면
구르긴 했어도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겁도 없이 한 손에 풍선을 들고 손잡이를 잡지 않고 내려오다가 휘청하면서 두 칸 정도 굴렀는데 이마와 머리 쪽을 부딪혔다. 잠깐 울고 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씩씩하게 놀이터를 활보하는 동영상도 도착했다. 아직 어리니까 판단하기 이르긴 하지만 소윤이가 애써
슬픔을 숙성시키고 묵상하는 것에 비해, 시윤이는 금방 금방 잊는 것 같다. 하긴 소윤이도 시윤이만 할 때는 순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얘도 언제 바뀔지 모른다.
그렇게 한바탕 놀이터에서 놀고, 집에 돌아와 씻기고, 낮잠 재우고, 자는 동안 점심 준비하고, 깨면 점심 먹이고. 아내의 지루하고 고된 일상은 오늘도 반복된다. 그나마 애들 노는 거, 웃는 거, 먹는 거 보면서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으면 괜찮은 하루가 되는 거고 심사가 뒤틀려서 울고 짜증 내기에 열심인 애들이 되면 가뜩이나 힘든데 정신까지 공격받는 하루가 되는 거고. 그나마 요즘은 소윤이가 말이 안 통할 정도로 통제불능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수월하게 보내고 있다.
소윤이 기침이 너무 잦다며 아내가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오늘 퇴근 후에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카페에 가서 일을 좀 하기로 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만 대놓고 바로 헬스장으로 갔다.
[여보, 로비층에 주차했어]
집에 들르면 아무래도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았다. 당연히 애 둘 데리고 병원 가는 일도 아내만의 일이 되었다. 운동하고 카페에 갔을 때 아내와 통화가 됐다.
"소윤이는 뭐래?"
"안 좋아"
"왜?"
"천식 아니면 폐렴일 가능성이 있대"
"진짜?"
"어, 엑스레이까지 찍었는데 하얗게 보이더라고, 이게 천식일 수도 있고 폐렴일 수도 있는데, 아직 정확히는 모른대. 일단 약 먹으면서 봐야 된다고 하던데. 어, 여보 잠깐, 시윤아 시윤아 시윤아."
약국을 제멋대로 쑤시고 다니는 시윤이를 막느라 통화는 중단됐다. 폐렴이야 약 먹고 치료하면 낫는다지만 천식이면 문제가 좀 다르다. 잠시 후 또 전화가 왔다
"아빠, 어디에여?"
"아빠 운동하고 이제 카페 왔어, 일하려고"
"또 일해요? 왜 계속 일해여?"
"아, 할 일이 있어서. 소윤이는 병원 잘 갔다 왔어?"
"네, 오늘은 혼자 앉았어여"
"진짜? 안 울고?"
"네, 안 울었어여"
"이야, 소윤이 다 컸네"
소윤이는 신나서 병원 무용담을 늘어놨고 난 격하게 반응했다.
"소윤아, 오늘은 아빠가 소윤이 잘 때까지 못 들어가니까 엄마 말 잘 듣고 짜증 내지 말고. 알았지?"
"네, 아빠 내일 만나여"
"소윤아, 이따가 소윤이 자고 있으면 아빠가 들어가서 뽀뽀해줄게"
"아빠, 딱 한 번만 해야 된다여"
"그래, 알았어"
아내에게 8시쯤 카톡이 왔다.
[난 이제 집에 도착]
[고생했어ㅠㅠ 아직 끝난 건 아니지만]
아내는 애들 저녁 먹이고 있다며 저녁 사진을 보내줬다. 한 30-40분 후쯤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울먹울먹)아빠아"
"어, 소윤아, 왜 울어"
"아빠가 보고 싶어서"
"아, 진짜, 아빠 오늘은 못 가는데. 소윤이 자고 있으면 아빠 갈 거니까 많이 울지 말고 엄마랑 얼른 자. 알았지?"
"네"
"이따가 아빠가 들어가서 소윤이 옆에 누울까? 아니면 그냥 엄마 옆에서 잘 거야?"
"아빠가 소윤이 옆에 누워여"
"알았어, 소윤이 옆에 누울게, 얼른 자"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다. 아내가 외출하고 내가 애들을 재울 때 가끔 엄마 보고 싶다며 울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굉장히 드문 일이고 내가 보고 싶다고 이렇게 울먹거리며 전화한 건 거의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아내에게 수면 지연용 핑계가 아니었는지 물어봤지만 그런 건 아니었고 정말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런 일은 반드시 자세히 기록해놔야 한다. 드문 일이니까. 거기에 잘 때 자기 옆에 누우라니. 이것도 거의 없는 일이다. 아내의 부재가 아니고서는 자기 옆자리를 나에게 허락하는 일이 없어서 자고 있으면 몰래 가서 누워 자다가 쫓겨나기 일쑤였는데. 아무튼 소윤이랑 전화를 끊고 나니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내는 애들 재우면서 살짝 잠들었다가. 제정신을 차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지 집으로 가려고 짐 챙기고 있을 때
[이제 정신 차리고 집 치우는 중]
이라고 카톡이 왔다. 집에 가보니 아내는 삼계탕 속 마늘처럼 폭하고 찌르면 바스러질 것 같은 그런 상태였다. 안타깝게 내일도 남은 일을 하려면 퇴근하고 바로 집에 오지 못할 것 같다. 아내가 묻는다.
"여보, 마감할 때는 원래 다 그렇지? 미리 해놓기는 힘든 거지?"
하면 하겠지만 해본 적이 없네. 여보. 초등학교 때는 방학 마지막 주에 미친 듯이 일기 쓰고 탐구생활 빈칸 채웠고. 중학교 때는 방학 마지막 주에 밀린 독후감 쓰느라 발췌독이라는 독서 방법을 체득하게 되었고. 대학생 때는 교수님이 강의 시작하는 날 리포트의 주제, 방법을 알려줘도 언제나 쫓기듯 리포트를 써냈고. 삶이 다 그런 거지 뭐. 어쩔 수 없어, 여보. 내일 하루만 더 고생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