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깨아빠 Dec 26. 2023

수육 체험

23.05.27(토)

오랜만에 축구를 쉬었다. 자의로 쉰 건 아니었고 경기 자체가 없었다. 아내는 어제 자기 전에


“내일 축구도 없는데 간만에 좀 늦게까지 자요”


라고 하면서 나의 아침 잠을 지켜줄 것을 약속했고, 덕분에 늦잠을 잤다. 내가 일어났을 때는 아침도 다 먹고 난 뒤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항상 축구를 하러 가는 남편 덕분에 토요일 늦잠을 포기해야 하는 아내가 ‘내일은 축구가 없으니 오랜만에 내가 늦잠 좀 잘게’라고 얘기해도 됐을 텐데.


오전에는 사진 촬영이 있었다. 아는 분이 가족사진을 촬영해 주시겠다고 했다. 소윤이나 시윤이는 함께 찍고 액자로 만든 사진이 있는데, 서윤이만 없었다. 집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고 서윤이가 종종


“왜 제 사진은 없어여?”


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찍기는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하던 와중에 마침 좋은 기회가 생긴 거다. 아이들은 예쁘게 입힐 옷이 많았는데(그래도 몇 개를 놓고 고를 만한 정도는 됐는데) 아내와 나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아이들 옷과의 색감, 너무 후줄근하지 않으면서도 과하지 않은 디자인, 내 몸의 꼴을 가려줄 핏을 모두 고려하다 보니 ‘고른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튼 골라서 입고 집에서 나왔다.


날씨가 엄청 후덥지근했다. 사진관이 강변에 있어서 사진을 찍고 나서는 강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오랜만에 각종 탈 것을 차에다 모두 실었다. 각종 놀거리도 잔뜩 실었다. 사진을 찍고 갈아입을 옷도 챙겼다. 날씨가 생각보다 더워서 조금 걱정이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각오로 나왔다. 집 근처 빵 가게에 들러 지인 분에게 사 드릴 빵을 사면서 소금빵도 샀다. 아내는 어제 먹어서 안 먹는다고 했다. 난 어제 먹어도 오늘 또 먹을 수 있고 내일도 또 먹을 수 있는데.


서윤이는 사진관으로 가는 길에 잠들었다. 평소에 낮잠 자는 시간이 아니라서 방심했는데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자다 깬다고 막 짜증을 내거나 울 때가 거의 없지만, 자다가 일어나서 바로 활짝 웃는 것도 어려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이는 촬영 초반에는 거의 웃음이 없었다. 사진을 찍어주시는 지인 분의 남편께서 각고의 노력으로 서윤이를 웃기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셨다. 시윤이는 애써 웃음을 감췄다. 분명히 웃음이 나오는데 안 웃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순간 순간 삐져나오는 웃음을 잘 포착하면 ‘웃는 모습’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윤이는 거의 기계였다. 자동으로 미소를 짓는 것도 모자라서 엄청 자연스러웠다. 난 힘들었다. 이렇게 각 잡고 사진 찍는 건 언제나 힘들다. 결혼 전에 웨딩사진 찍고 일주일을 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야외에서도 찍었다. 서윤이가 이때부터 웃기 시작했다. 수줍게 웃는 게 아니라 대놓고 웃었다. 잠이 좀 깬 건지, 바깥이 자기와 맞았던 건지 아무튼 엄청 활짝 웃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고 결과물을 보여주셨는데, 참담했다. 사진으로 마주한 내 모습이. 마치 처음 스피치 학원에 등록해서 내 목소리를 모니터링 할 때처럼 낯 뜨거웠다고 해야 하나. 가족사진을 찍으러 왔지만 나중에 액자로 만드는 건, 아이들만 찍은 사진으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강변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래도 그늘진 곳에 자리가 좀 있어서 거기에 돗자리와 캠핑의자를 폈다. 점심은 근처 김밥 가게에서 김밥을 샀다. 시원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워서 못 견딜 날씨도 아니었다. 햇볕이 없고 서늘한 곳을 잘 찾으면 오히려 기분 좋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주차가 마땅하지 않아서 근처의 교회(라고 하기에는, 소윤이가 세례를 받았던, 아내와 나의 신혼시절을 채운)에 차를 댔는데 행사가 있어서 차를 빼야 한다고 했다. 차를 댈 곳이 없어서 거의 30분을 헤맸다. 막 놀 준비를 하고 출동하려던 소윤이와 시윤이가 매우 힘들어 한다고, 아내가 얘기해 줬다.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려면 자리를 잡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시야에서 벗어나는 곳)으로 가야 하니 아내가 같이 가야 하는데, 자리를 비워두고 가는 건 왠지 꺼림직하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거다. 심지어 서윤이가 똥까지 쌌다고 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네”


육아를 하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된다. 진퇴양난. 겨우 차를 댔다. 아내는 그제야 서윤이의 뒤처리를 위해 자리를 떴다. 아내가 귀중품을 챙겼다. 자리를 그냥 비워두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K의 아내도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다고 했다(K는 일을 하고 있었다). K의 아내와 자녀들을 마중 나갔다. K의 아내와 자녀들은 내려서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으로 가고, 내가 K의 차에 탔다. 마침 우리 차 바로 옆에 자리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주차를 하고, 오늘의 유일한 ‘남성 양육자’의 역할을 시작했다.


K의 막내만 빼고, 양쪽 집의 자녀 5명을 데리고 공원 안에 있는 놀이터에 갔다. 꽤 멀어서 한참 걸어야 했지만, 위험한 요소가 없어서 힘든 길은 아니었다. 놀이터에 도착해서도 자녀들끼리 잘 논 덕분에 난 잠시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중간 중간 내 옆에 와서 애교를 부리는 서윤이와 뛰어노는 자녀들을 보면서.


자녀들도 놀이터가 조금 지루해진 듯했고, 마침 차를 빼 달라는 연락이 와서 아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자녀들은 잠시 맡겨두고 차를 빼러 갔다 오면서 쭈쭈바 다섯 개를 샀다. 가기 전에 아이들과 이미 합의를 했고, K의 아내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K의 첫째와 둘째, 소윤이와 시윤이, 그리고 서윤이까지. 쭈쭈바 하나에 엄청난 기쁨이 찾아왔다. 소박한 녀석들. 꼬다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쪽쪽 빨아먹는 모습이 다 귀여웠다.


아이스크림으로 당을 충전한 아이들은 2차전(?)을 시작했다. 아내와 K의 아내는 자리를 지키며 막내들을 돌봤고, 난 나머지 네 자녀와 함께 옆에 있는 광장으로 갔다. 소윤이는 인라인스케이트를 조금 타다가 자전거를 계속 탔고, K의 첫째와 시윤이는 함께 야구와 축구를 하다가 자기들끼리 놀기도 했다. K의 둘째가 나와 한참 놀았다. 야구도 한참 하고, 자전거도 한참 탔다. 자전거를 처음 타는 거라고 했는데 꽤 오랫동안 집중해서 탔다. 네발 자전거이긴 했지만 처음 타는 거라 조작이 미숙해서, 난 계속 뒤에서 쫓아다니며 잡아주고 밀어줬다. 시윤이와 K의 첫째는 두발 자전거를 타 보고 싶다고 해서 태워줬는데, 한 번으로 끝이었다. 쫓아다니면서 잡아줄 체력이 없었다. 아니 체력이 있었지만 그렇게 쓰고 나면 남은 시간에 녹초가 될 것 같았다.


저녁도 함께 먹었다. 한우국밥 가게에서 먹었는데 실내가 꽤 더웠다. 더운 곳에서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으니 땀이 났다. 하루 종일 땀을 많이 흘렸다. 자녀들은 저녁을 먹고 나와서도 또 놀자고 했다.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이미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날이 너무 환했다. 해가 길어져서 웬만큼 늦지 않고서는 대낮처럼 밝다. 일단 놀이터에 가기는 했는데 날벌레가 너무 많았다. 모기도 많을 것 같았다. 자녀들은 나에게도 역할을 부여하며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럴 만한 체력이 없는 상태였지만 기꺼이 자녀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소윤이가 자꾸 이상한 규칙을 추가하는 바람에 재미가 반감되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금방 갈 예정이었으니까. 아주 잠깐 놀고 헤어졌다.


밖에서 공으로 노는 건 재미가 있어서 크게 힘들지 않았는데, 하루를 마칠 때가 되니 마치 수육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하루 종일 땀에 절어 있었던 느낌이랄까.

매거진의 이전글 빵으로라도 어떻게 좀 해 볼까 싶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