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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Dec 28. 2023

집안일 얘기하니까, 갑자기

23.05.29(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도 내리는 김에 집에만 있기로 했다. 적당히 휴식도 취하고 미뤄둔 집안일도 좀 할 생각이었다.


미뤄둔 집안일은 대체로,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싫어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인 건 화장실 청소였다. 누군가에게는 설거지처럼 ‘미룰 수 없는’ 영역에 속하겠지만, 난 또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주말에 항상 바쁘다. 이 이유를 당당히 내세우기 어려운 건, 안 바빠도 안 했을 가능성이 높고(실제로도 그렇고), 아무리 바빠도 마음이 있으면 하기 마련이고. 아무튼 오늘은 아내가 따로 얘기를 꺼내기 전에 (이미 그전부터 수차례 얘기했지만) 청소를 자처했다.


다음은 뒷베란다 우수관 겉면에 낀 곰팡이와 이물질 제거하기. 꼭대기 층부터 이어지는 우수관이 있는데, 아마도 전 주인이 냄새 혹은 벌레 방지를 위한 무언가를 설치하면서 아무래도 관 크기를 잘못 맞췄는지 윗집 혹은 그 윗집에서부터 흐르는 물이 우수관 겉면을 타고도 흘러내린다. 그러다 보니 곰팡이도 끼고 이물질도 묻어서 매우 더러워지는데, 그걸 닦아낼 때가 된 거다. 알코올 티슈와 물티슈를 활용해서 열심히 닦아냈다. 금세 또 더러워질 테니 무슨 소용이 있나 싶지만, 그렇게 따지면 할 일이 없다.


마지막은 대망의 책장 정리. 공부방에 있는 책장에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가 아무렇게나 쑤셔 박은 잡동사니와 책을 정리하는 게 오늘의 가장 큰 과업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책장에 관해서는 그동안 소윤이나 시윤이에게 무게감 있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너무 ‘정리정돈’을 강조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았고(책장이 아니더라도 정리할 게 많으니까), 나도 원래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아이들이 온갖 물건과 책을 책장에 아무렇게나 던져놔도 입을 꾹 닫았다. 어차피 어느 순간 아이들이 정리할 수 있는 선을 넘기도 했고.


오늘도 아이들에게 정리를 시키지는 않았다. 대신 ‘무자비한’ 인간청소기가 되었다.


“이거 버린다”

“아빠. 그건 버리면 안 돼여”

“왜?”

“아, 그건 제가 ‘어쩌구저쩌구이런저런이유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평소에 정리를 잘했어야지. 평소에는 어디 있는지 신경도 안 쓰다가 버린다고 그러면 어떡해”


나 말고는 다 ‘못 버리는’ 사람이다. 아내도, 소윤이도, 시윤이도. 시윤이가 그나마 내 쪽에 가깝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하다 보니 난 ‘버리는 심판자’처럼 됐고 소윤이와 시윤이, 그리고 아내도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왜 항상 정리는 유쾌하게 할 수 없을지 궁금하다가도 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곳저곳에 처박아 놓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견하더라도, 사랑과 관용의 마음만 잃지 않으면 괜찮을 거다.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게 문제지. 내가 너무 무거운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난 뒤에는 최대한 부드럽고 밝게 해 보려고 했지만, 크게 영향은 없었을 거다.


정리의 시간이 끝나고 점심으로 탕수육을 먹자고 했다. 내가. 아내는 서윤이를 재우러 들어가고 난 탕수육을 사러 갔다.


“아빠. 우리도 같이 가고 싶어여”

“아니야. 집에 있어. 비도 내리고. 어차피 엄청 금방 갔다 와”


집에서 3분이면 가는 곳이었다. 어차피 금방 갔다 오니까 혼자 가겠다는 말을, 그만큼 가까우니 함께 가도 되지 않느냐고 풀어서 따지면 할 말이 없었을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러지는 않았다. 탕수육을 사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내도 서윤이를 재우고 나왔다. 서윤이가 먹을 건 따로 챙겨놓고 우리끼리 먼저 먹었다.


“그때보다 양이 조금 적어진 거 같아”

“아니지. 그때는 다른 것도 시켜서 같이 먹었잖아”

“아, 그렇구나. 오늘은 그냥 밥이랑 먹으니까 그렇구나”


그때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었다는 건지.


점심을 먹고 나서는 역시나 보드게임을 했다. 아내도 함께. 자고 일어난 서윤이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대대적인 집안일을 하고 나서는 대체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으니 저녁에는 잠깐 나갔다 오고 싶었는데, 여전히 비가 내렸다.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잠깐 가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가서 할 걸 챙기라고 했더니 그림 그릴 것도 챙기고, 색종이도 챙기고, 책까지 챙겼다. 아내가 밤에 자유시간을 즐기러 카페에 갈 때 준비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아내와 나는 커피를 마셨고, 아이들은 빵 하나와 크로플을 먹었다. 역시나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렸고, 아내와 나는 여유롭게 그냥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아이들에게 집안일 분배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내가 얼마 전부터 아이들에게 집안일 분배를 다시 하고 조금 꼼꼼하게 역할과 책임을 맡기자고 얘기했다. 아이들에게 아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게 훨씬 ‘공표’의 느낌이 있으니, 내가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했고. 아내와는 대략적인 집안일 분배를 의논했다. 언제 얘기하나 싶었는데, 마침 오늘 좋은 기회가 생긴 거다. 아이들에게 전달하면서, 혹시나 무리하다고 생각하는 건 얘기하라고 했다. 다들 잘 수긍했다.


얘기를 잘 나누던 시윤이가 갑자기 엄청 피곤해했다. 마치 어디 몸이 안 좋은 사람처럼 급격히 기력을 잃고 얼굴 표정도 어두워졌다. 정말 갑자기 그랬다. 몸이 아픈지 물어봤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고, 그럼 피곤하냐고 했더니 자고 싶다고 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싶기는 했지만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시윤이가 다시 활력을 찾았다. 희한했다. 그러다 문득 시윤이의 모습과 비슷한 누군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 나였다.


“여보. 시윤이 왠지 아까 집안일 얘기해서 그런 거 같아”

“왜?”

“그냥. 나도 그럴 때 있거든. 여보가 집안일 얘기하면 그냥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안 좋아지고 그런 거. 여보가 이상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그냥 집안일 얘기하는 거 자체가 나에게 별로 좋지 않은 거지. 시윤이도 나랑 비슷한 거 같은데?”

“진짜? 어이없어”


아내가 고생이 많다. 강 씨 남자 두 명과 사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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