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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03. 2024

막내의 무한권력

23.06.08(목)

오늘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소윤이 피아노 수업 때문에 교회에 왔고, 난 일을 하고 있었다. K네 가족도 우리와 똑같았다. 어떤 주에는 하루, 이틀을 제외하고는 매일 교회에 오는 것도 모자라서 교회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 날이 기본으로 2, 3일이니 이 얼마나 공동체 지향적인 삶인가.


2층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아내와 아이들이 오는 게 보인다.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역시나 분위기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아내의 표정과 공기를 가르는 아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의 온도랄까. 한가롭고 여유 있는 건 거의, 아니 아예 없다. 그건 기본값이고 바쁘지만 괜찮아 보이는지, 바쁘면서 괜찮지도 않은 지가 나의 핵심 관찰요소다. 오늘은 표정은 못 봤다. 다소 늦어서 바쁘게 들어오는 아내와 아이들의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도 들렸다. 소윤이는 바로 3층으로 올라가는 듯했고, 아내는 시윤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무겁고 단호하게. 부디 오늘 하루도 아내가 잘 지켜나가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점심은 김치볶음밥이었다. 아내와 K의 아내가 열심히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었고, 자녀들은 놀고 있었다. 잠깐 자녀들과 놀아주고, 아니 자녀들은 알아서 잘 논다. 자녀들끼리 있을 때 발생하는 불안감을 느낄 엄마들을 위해, 자녀들 곁에서 보호자의 역할을 맡았다. 밥이 금방 돼서 아주 잠깐이었다. 김치볶음밥은 당연히 맛있었다. 밥 먹고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밥값을 대신했다.


오후에는 외부 일정이 있어서 교회에서 조금 더 일을 하다가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보다 먼저 교회에서 떠났다. 시간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았다. 오후 일정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혹시 아직도 교회면 커피를 한 잔 사다 주겠다는 거였다. 교회에서 이미 떠났지만, 아내가 가는 카페와 내 목적지가 그렇게 먼 곳이 아니라 아주 잠깐 고민했다.


‘아내에게 가서 커피만 받을까?’


그냥 원래 목적지로 향했다. 귀찮았다. 너무 맛있는 커피라서 잠깐 흔들렸지만.


퇴근이 늦지는 않았다. 아내에게 아주 갑작스럽게 자유시간을 제안했다. 예의상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아내에게


“별로? 그럼 그냥 집에 있어도 되고”


라고 말했더니 바로


“나야 좋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는 함께 저녁을 먹고 나갔다. 아이들은 현관에서 인사를 하고, 바로 베란다로 뛰어가서 차로 타는 아내에게 또 인사를 하고, 차를 타고 떠나가는 아내에게 또 인사를 했다.


퇴근이 일러서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아이들을 바로 눕히기에는 조금 빠른 시간이었다). 보드게임을 몇 판 했다. 그래도 이제 보드게임 하면서 졌다고 속상해하고 그런 일은 잘 없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나를 닮은) 시윤이가 우길 때가 가끔 있지만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런 모습이 잘 안 나타난다. 보드게임을 즐겁게 마쳤다.


서윤이는 낮잠을 늦게, 오래 자서 밤에 안 잘 걸 예상했다. 요즘은 소윤이와 시윤이도 밤에 금방 안 잘 때가 많다. 오늘도 그랬다. 자기들끼리 낄낄대고 숙덕숙덕 대고. 그래도 한참을 아무 말도 안 하고 뒀다. 아빠가 이렇게 아량을 베풀면, 자기들도 적당히 하고 끝내는 게 있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걸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마지막에는 주의를 좀 줬다. 주의를 받고도 한참을 더 떠들다가 조용해졌다. 조금 조용해져서 들어가 보니 서윤이는 여전히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모두 바닥으로 내려와서 엉킨 채 잠들었고.


“서윤아”

“네헤?”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서윤이를 보고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무척 달콤하고 다정한 말투로


“서윤아. 언니랑 오빠도 다 자니까 서윤이도 얼른 자. 알았지?”


라고 얘기하고 끝이었다. 막내의 막강 권력은 언제쯤 소멸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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