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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06. 2024

아빠, 데이트 갈 수 있어여?

23.06.12(월)

오후가 끝나갈 무렵에 소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저 오늘 아빠한테 데이트 사용권 쓰면 데이트 갈 수 있어여?”

“오늘? 갑자기 왜?”

“그냥여. 오늘 데이트 하고 싶어서여”

“그래. 알았어”


그전에도 소윤이가 데이트 사용권을 쓰겠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장난이 섞인 요청일 때가 많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진짜 쓰고 싶었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우니 안 될 거라고 스스로 판단해서 그랬을 거다. 오늘은 사뭇 느낌이 달랐다. 소윤이가 진지하게 제안하는 느낌이었고 왠지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만약에 거절하면, 왠지 소윤이의 마음에 큰 벽이 하나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너무 극단적인 느낌이기는 했지만. 당장 급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소윤이와 통화를 마치고 바로 일을 마무리했다.


아내와도 사전 협의가 된 건지 물어봤는데 아내도 괜찮다고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도 크게 이견이 없었다. 뭐 사실 이견을 제시할 권리(?)도 없기는 했다. 집에 도착하니 시윤이와 서윤이는 각자 세운 데이트 계획을 알리기 바빴다. 오늘은 누나에게 양보하는 대신 자기들도 곧 데이트를 할 거라는 의사표현이었다.


조금 일찍 퇴근했다고 해도 시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소윤이에게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봤는데 딱 하나를 얘기했다. 관람차가 타고 싶다고 했다. 막상 타면 별 거 아니어도 타기 전에는 한번 타 보고 싶은 생각이 드나 보다. 관람차를 타고, 저녁을 먹고, 그 이후에는 별 계획이 없었다. 소윤이는 관람차 타는 거 말고는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했다. 카페를 가도 좋고, 잡화점에 가서 구경하는 것도 좋고. 일단 서둘러 나왔다. 퇴근시간과 겹치면 차가 막힐 것 같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오늘 갑자기 왜 데이트를 신청했냐고 물어보면서,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소윤이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이렇게 대답했다.


“쪼금?”


무슨 일이었는지 상세한 상황을 듣지는 못했지만, 소윤이는 속상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냥. 저도 노력했는데 돌아오는 게 없는 것 같아서여”


어떤 상황이었을지 대충은 짐작이 됐다. 얼마나 속상한 일이 많을까 싶다. 잘 할 때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 칭찬은 못 듣고, 계속 잘 하다가 한번 잘못하면 많이 혼나고, 동생들은 말도 안 듣고, 참다 참다 조금 표현하면 또 잔소리 듣고, 첫째라서 잘 하는 것도 많고 해야 하는 것도 많고. 소윤이의 데이트를 거절하지 않은 게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막히기 전에 시내로 나갔다. 관람차가 있는 백화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는데 ‘금일휴뮤’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백화점은 명절 당일에만 휴무를 하는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소윤이는 꽤 아쉬워했다. 어쩔 수 없이 바로 식당으로 갔다. 우동을 파는 곳이었다. 아내와 신혼 때 종종 갔던 곳이었고, 소윤이도 음식을 듣더니 좋다고 했다. 우동 한 그릇과 함박스테이크 정식을 주문했다. 소윤이는 별로 못 먹었다. 엄청 피곤해 보였다. 비염이 심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비염이 폭발해서 쉬지 않고 코를 풀었다. 몸이 안 좋은 건 아니라고 했고 그냥 엄청 피곤하다고 했다. 우동과 함박스테이크도 맛은 있다고 했는데 많이 먹지는 않았다.


밥을 먹고 나서 어디를 갈까 하다가 큰 문구점에 가기로 했다. 문구점이지만 웬만한 게 다 있는 곳이었다. 소윤이가 거기를 가자고 했다. 소윤이는 시윤이와 서윤이에게 줄 선물을 고르느라 고민이 깊었다. 서윤이 선물은 금방 골랐다. 스티커였다. 시윤이 선물을 고르는 게 오래 걸렸다.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가 있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고르려고 하니 힘든 일이었다. 소윤이는 자기 용돈에서 시윤이와 서윤이에게 각각 1,000원 씩 지출할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사 주는 건 싫고, 동생들이 좋아하면서도 자기 용돈의 범위 안에서 사 주려고 하다 보니 한참을 돌았다. 오늘은 소윤이를 위한 날이기도 하고, 빨리 나가야 하는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고르도록 뒀다.


“소윤아. 근데 이렇게 구경하면서 고민하는 것도 즐거운 거 맞지?”

“네. 재밌어여”


구경하면서 고민하는 것 자체가 재밌나 보다. 너무 아내 같다. 거의 한 시간을 넘게 1층부터 3층까지 샅샅이 구경했다. 결국 시윤이 선물은 색종이로 낙점했다. 자동차 만화 캐릭터 접기를 할 수 있는 색종이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시윤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았다. 소윤이 선물도 하나 고르라고 했다. 그건 내가 소윤이에게 사 주는 선물이었다. 그것도 고민이 깊었다. 처음에는 종이모형 장식품에 마음이 끌렸는지 그걸 한참 구경했다. 만들어서 책상 위에 두면 제법 예쁠 것 같기는 했는데, 조립하는 게 엄청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쉬울 것 같았다. 소윤이도 그것 때문에 결국 내려놨다. 소윤이는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수첩 세트를 골랐다. 자물쇠(내가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이 빈약하긴 했지만)가 있는 수첩과 펜이 있는 제품이었다.


문구점에서 나와서는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일단 집 근처로 가기로 했다. 소윤이에게 시내에 있는 카페에 있다가 집으로 갈 건지,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있다가 집으로 갈 건지 선택하라고 했는데 집 근처로 가자고 했다. 시간이 늦다 보니 소윤이도 집 근처에 있는 게 마음이 편했나 보다. 차로 가는 길에 탕후루를 하나 사 줬다.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언제 먹겠나 싶었다. 소윤이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사라지는 탕후루를 아쉬워 할 정도로.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서 나는 커피, 소윤이는 크로플을 먹었다. 소윤이는 교회에서 간식으로 받은 주스도 가지고 왔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소윤이는 나에게 계속 크로플을 떠서 줬다. 두어 번 먹고는 ‘이제 진짜 괜찮으니 혼자 다 먹어’라고 얘기했다. 물론 그 뒤에도 계속 권했다. 카페에서는 특별히 한 게 없다. 소윤이는 선물로 받은 수첩 세트와 동생들 선물을 구경했고, 난 그런 소윤이를 봤다.


“소윤아. 소윤이는 하루 중에 언제 제일 속상해?”

“글쎄. 잘 모르겠어여”

“그럼 언제 제일 행복해?”

“음. 이럴 때?”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한 게 없었는데, 소윤이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듯했다. 소윤이도 생각보다 과묵하고 담백한 성격으로 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누워 있기는 했지만 자고 있지는 않았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소윤이가 건넨 선물을 아주 흡족하게 받았다. 그야말로 천 원의 행복이었다. 시윤이도 엄청 마음에 들어 했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다시 한번 자기들의 데이트 계획을 얘기하면서, 언제 가능하냐고 물었다.


자녀들이 아빠와 데이트를 하겠다고 줄도 서고. 행복한 인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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