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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17. 2024

에어컨이 좋긴 좋네

23.07.01(토)

아침에 축구를 마치고 이곳저곳을 들러서 아내가 부탁한 임무를 수행했다. 처치홈스쿨 종강예배 때 쓸 꽃과 케이크를 사서 왔다. 아내는 종강예배를 마치고 함께 먹을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먼저 교회로 갔고 나와 아이들은 조금 더 늦게 갔다.


종강예배 때 상장을 주면서 작은 선물을 하나씩 주는데, 어제 급하게 주문을 했다. 새벽에 배송이 가능한 걸로 주문을 한다고 했는데 소윤이 것만 오고 시윤이와 서윤이 것은 오지 않았다. 교회에 가기 전에 시윤이와 서윤이에게 미리 설명을 해 줬다. 혹시나 모르고 있다가 자기들 선물만 없어서 서운해 할까 봐. 예배드릴 때는 없겠지만 오늘 안에 온다고는 했으니 서운해 하지 말아 달라고 설명했다. 시윤이는 조금 아쉬워 하는 눈치였지만 이해해 주기는 했다.


소윤이는 ‘로빈후드의 모험’이라는 책, 시윤이는 야구의 역사와 규칙이 적힌 책, 서윤이는 텀블러였다. 책은 소윤이를 엄청 흥분시키는 책은 아닐지 몰라도 항상 기본은 하는 선물이다. 서윤이는 언니와 오빠가 텀블러를 들고 다닐 때마다 자기만 텀블러가 없다고 하면서 아쉬워 해서 텀블러로 결정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것만큼 좋은 건 아니었고 조금 저렴한 걸로 골랐다. 시윤이 선물을 가장 많이 고민했다. 적당한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이것저것 후보에 올리고 고민을 하다가, 글밥이 많은 책도 잘 읽고 요즘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고 궁금해 하는 시윤이의 취향을 고려해서 골랐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자기 선물은 무엇일지 엄청 궁금해 했지만 집에 와서 확인할 때까지 얘기해 주지 않았다.


소윤이는 대표기도도 맡아서 했는데, 엄청 떨린다고 했다. 소윤이는 항상 떨고 부끄러워 하지만 못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마치 그 순간의 모습만 보면 전혀 떨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잘 한다. 시윤이와 서윤이는 다른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영어 찬양을 불렀다. 이 영어 찬양 덕분에 그동안 아내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린 자녀’로 분류되는 것이 싫었던 시윤이가 연습을 할 때마다 안 하겠다고 고집도 부리고 선을 넘어서 애를 많이 먹었다. 오늘도 시윤이는 안 나가겠다고 실랑이를 좀 벌였고 아내가 함께 나가는 조건으로 겨우 나갔다. 막상 나가서는 제법 열심히 불렀다.


종강예배를 마치고 나서는 함께 밥을 먹었다. 비빔국수와 수육을 먹었는데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아침을 거르다시피 해서 다들 엄청 배가 고픈 상태였다. 시윤이는 비빔국수를 세 번이나 더 담아서 먹었고, 소윤이는 국수보다는 고기를 많이 먹었다.


예배를 드리고 나서는 다 함께 카페에 갔다. 자녀들이 많다 보니 마당이 있는 카페로 갔다. 아내들은 실내에 앉아서 대화를 나눴고, 아빠들은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앉았다. 날이 무척 더웠지만 그늘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솔솔 불어서 괜찮았다. 그늘을 벗어나서 조금만 움직이거나 햇볕으로 나가면 바로 땀이 흐르는 날씨였다. 자녀들은 끊임없이 아빠들에게 함께 놀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계속 응해주기는 어려웠다. 꽤 오랜 시간 카페에 머물렀다. 집에 갈 때가 되서 잠깐 아내들이 앉아있는 실내로 들어갔는데, 엄청 시원했다. 그늘의 시원함 따위는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닌, 최첨단의 시원함이었다. 아내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집에 돌아오니 시윤이와 서윤이의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다행히 둘 다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시윤이는 바로 책을 펴고 앉아서 읽기 시작했고, 서윤이는 자기도 텀블러가 생겼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야구 규칙을 물어보는 시윤이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게 꽤나 어려워서 애를 먹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


“시윤아. 나중에 자세히 알려줄게”


라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지만 잘 참고 끝까지 잘 알려줬다. 기껏 보라고 사 주고서는 성의껏 답변을 해 주지 않으면, 그것만큼 못 된 짓이 어디 있나 싶어서.


아, 요즘 서윤이가 다시 배변을 가리기 시작했다. 요즘 느낌에, 서윤이가 밖에서는 똥을 안 싸고 집에 오면 똥을 싸는 것 같아서


“서윤아. 똥 마려우면 미리 얘기 한 번 해 봐”


라고 가볍게 얘기하고 그랬는데, 오늘 아침에는 정말 변기에 똥을 쌌다. 서윤이 스스로도 엄청 좋아했다. 기저귀의 불편함과 찝찝함이 싫지만 스스로도 완전히 가리지 못하는 걸 아니까 기저귀를 입기 싫다고 말을 못하는 것 같았는데, 자기도 후련했나 보다. 저녁에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변기에 싸는 걸 성공했다. 따져보니 거의 10년을 기저귀와 함께 보냈는데, 드디어 잠깐이나마 휴식기를 가질 수 있는 건가 하는 희망을 품게 됐다.


그래도, 압박은 하지 말아야지. 무언의 압박도, 은근한 압박도. 언제든지 기쁜 마음으로 똥을 받아줘야지. 그게 기저귀든 변기든.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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