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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20. 2024

아내와 아이들이 사라졌다

23.07.07(금)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새벽같이 일어났는지 일찍부터 소란스러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시윤이는


“아빠. 얼른 7월 7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라고 하면서 기대했고, 소윤이는 어제 자기 전에 이렇게 얘기했다.


“아빠. 너무 떨려여”

“왜?”

“내일 너무 신이 날 것 같아서여”


며칠 동안 아빠를 못 본다는 아쉬움 따위는 흐릿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소윤이는 대한민국의 장녀 다운 모습을 보였다. 막 잠이 깬 내 가슴에 편지를 두고 갔다.


“아빠. 편지 읽어 봐여”


사랑하고, 없는 동안 잘 지내라는 내용이었다. 핵심 내용이 하나 더 있었다. 아침마다 구운 계란을 꼭 챙겨 먹으라는 거였다.


“아빠. 편지를 중문에다 붙여 놔여. 아침에 까먹지 않게”


아내와 아이들은 오늘부터 6일 동안 부모님 댁에서 지낸다. 형님(아내의 오빠)네가 곧 출국을 하는데(최소 1-2년은 있다가 온다고 했다) 그 전에 얼굴을 보러 가는 김에, 내 부모님 댁에서도 며칠을 보내는 거다. 오늘부터 주일까지는 내 부모님 집에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아내의 부모님 댁에서.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가 그토록 설렐 만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먹을 간식도 잔뜩 준비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아침 일찍 KTX 역에 데려다줬다. 결혼하고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부모님과 가깝게 살 때는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에 가서 하루 이틀 정도 보내고 온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장박은 처음이었다. 사실 혼자 남은 나보다는 아내가 더 걱정이었다. 아무리 친정이어도 이제 자기 집만큼 편하지는 않기도 하거니와(하물며 시댁은 어떻겠나. 아내는 시댁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지만) ‘아빠 없는 자녀들’과 보내야 하는 시간을 향한 막막함과 두려움이 있었다.


아이들에게도 신신당부를 했다.


‘아빠가 없을 때 엄마 말씀을 더 잘 들어야 하고, 이번에 너희가 잘 지내고 와야 다음에도 또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번에 엄마가 너무 힘들면 다음에 이런 시간을 또 가지기는 힘들 거다’


말을 해 놓긴 했지만, 아내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떠났고 난 혼자 남았다.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는 과장님이나 부장님이 왜 그렇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버티는지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했다. 퇴근 욕구는 여전했지만 귀가 본능이 발동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퇴근=육아=아내의 조력자로 변신’의 체계가 세포 구석구석 자리 잡았는데, 빠른 귀가의 명분이 사라진 거다.


원래 야구를 보러 가려고 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야구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사직구장에 가 보는 게 작은 소원이었는데, 마침 이번에 사직구장에서 LG트읜스의 경기가 있었다. 나의 오랜 소원은 대자연의 횡포 앞에 산산조각이 났다. 비가 왔다. 많이. 경기 몇 시간 전에 이미 우천 취소 공지가 떴다. 적잖이 아쉬웠다. 일단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뭘 할까 고민을 했다. 그냥 집에 있기는 아쉬웠는데 비가 오니 또 마땅히 할 게 없었다. 사실 야구장에 가는 게 아니면 비가 안 와도 마찬가지긴 했을 거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마침 집 근처에 영화관도 있었고.


최근에 가장 관객을 많이 모은 영화를 예매했다. 약간 끝물이라 아직 상영을 하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있었다. 영화관이 엄청 작았다. 거기에 관객도 엄청 없었다. 혼자 온 건 나밖에 없었고, 전체 관객을 다 합해도 20명이 안 됐다. 후미진 자리로 예매를 했다고 했는데, 관이 워낙 작다 보니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두 자리 정도 떨어진 곳에는 고등학생 커플이 앉았다. 아주 가벼운 상업영화라 중간 중간 웃긴 장면이 많았다. 혼자 와서 너무 크게 웃고 그러면 너무 없어 보일까 봐 나름대로 잘 틀어막았는데, 무방비 상태로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 몇 개 있었다. 튀어나오는 웃음을 미처 붙잡지 못하고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옆 자리에 앉은 고등학생 커플이 속닥거렸다. 내 얘기를 하는 건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괜히 민망했다. 그러고 보니 태어나서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게 처음이었다. 영화를 봤다는 나의 소식에 아내는 이렇게 답장을 했다.


“나도 정말 행복하네^^”


아내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엄청난 의지를 내며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초감정.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기”


역시나,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아내에게는 여러 악조건이 산재했다. 남편의 부재,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등에 업은 자녀들의 불손함 등. 그렇다고 아내가 괴롭거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아내도 오랜만에 (시)부모님과 (내) 동생네를 만나서 반갑고 즐거웠지만, 꼴 보기 싫은 내 자녀의 모습을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는 게 힘들다는 얘기였다.


아내가 사 놓은 고기를 바로 오늘 구워 먹었다. 아주 맛있었다. 오마카세 부럽지 않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고기 굽기였다. 아내와 아이들이 없는 집이 무척 어색하고 쓸쓸했지만, 정말 편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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