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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22. 2024

아내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하려면

23.07.10(월)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아내가 없는 일상이 지속될수록, 아내를 보고 배운 것들을 나도 모르게 행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냉동실에 있던 불고기를 식탁에 꺼내 놓았다. 저녁에 먹으려면 아침에는 꺼내 놔야 적당히 해동이 된다는 걸 아내로부터 배웠다. 어제 샤워하고 쓴 수건은 식탁 의자에 넓게 펼쳐서 널었다. 젖은 채로 빨래통에 쑤셔 박으면 악취를 생성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아내로부터 배웠다. 자기 전까지 틀었던 에어컨을 바로 끄지 않고 ‘송풍’으로 전환하고 1시간 후에 ‘꺼짐 예약’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쪽에 곰팡이가 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걸 아내로부터 배웠다. 이런 걸 하나씩 곱씹으면서 생각하고 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입력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고 많이 어색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가 보기에는 아직 미덥지 않겠지만 큰 변화다.


의자에 널어놨던 수건은 오늘 샤워하고 또 썼다. 킁킁 냄새를 맡아봤더니 괜찮았다. 새 수건처럼 보송하지도 않았고 아무 냄새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쓸 만 했다. 통장에는 절대 적용 불가능한 법칙이던 ‘티끌 모아 태산’이 빨래에는 너무도 성실하게 적용된다는 걸 새삼 체감하고 있다. 재활용만이 살 길이다. 설거지도 마찬가지다. 어제 저녁에 먹은 걸 바로 치우지는 않았지만 오늘 저녁에도 미루지는 않았다. 마치 복리 이율이 적용된 통장과 비슷하다. 산더미처럼 불어난다. 오늘 저녁을 먹기 전에, 어제 저녁 먹느라 쓴 그릇을 말끔히 씻었다. 식기세척기에 아직 돌리지 않은 그릇들이 있지만 그건 괜찮다. 나의 든든한 동반자, 식기세척기가 있으니까.


시윤이가 열이 난다고 했다. 서울에 올라간 첫 날, (내)동생네도 함께 있었는데 조카(동생 딸)가 갑자기 수족구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윤이도 수족구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형님(아내의 오빠)네 식구, 친한 언니네 식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기 전에 증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일단 식당에 가기는 했는데 시윤이는 아내에게 안겨 있었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구토도 했다. 아내는 저녁을 먹고(먹었다고 하기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바로 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일단 수족구 증상은 없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다. 추정만 무성할 뿐이다. 수족구가 아니더라도 시윤이가 아플 만한 이유는 많았다. 일단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을 며칠 동안 지속했다. 거기에 매일 지치도록 놀았고. (내) 부모님 집에 있을 때는 에어컨 바람도 많이 쐬었다고 했다. 오늘은 점심 먹고 나서 간식도 많이 먹었고 배가 부른 상태에서 욕조에 들어가서 목욕도 했다고 했다. 일단 수족구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긴 했다. 수족구보다는 단순 감기나 몸살인 게 차라리 낫지 않나 싶었다. 시윤이는 계속 잔다고 했다. 저녁도 안 먹고. 숱하게 숱하게 겪은 자녀들의 고열과 처짐 현상이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고 안쓰럽다.


소윤이와 서윤이는 아직 멀쩡하다고 했다. 가장 안 좋은 상황은 순차적으로 증상이 나타나는 거다. 시윤이가 끝나면 소윤이나 서윤이, 둘 중 하나가 끝나면 또 나머지. 차라리 한 방에 묵직하게 맞는 게 낫다.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가장 좋은 건 시윤이로 끝나는 거고.


아내는 오랜만에 대학교 친구(정확히 말하면 언니)를 만나기로 했는데, 아픈 시윤이 덕분에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아내는 고민했다. 시윤이에게 물어봤더니 ‘내가 깨어 있을 때 가면 안 되고 내가 잠들고 나서는 가도 된다’라고 답했다고 했다. 아무리 잠들었어도, 아픈 아들을 두고 나가는 게 마음이 편할 리 없으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음에 보면 되지 뭐’라고 하기에는 서로 너무 멀리 산다. 이번 만남도 이곳으로 이사 오기 직전에 본 뒤, 1년 만의 만남이었다.


“여보. 시윤이 잠들면 00이 만나러 가도 되지 않을까?”


보고 싶은 얼굴을 오랜만에 만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내에게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갔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을 했고, 아내에게도 나의 생각을 전했다. 아내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소윤이와 서윤이는 야심한 밤에 처가댁 근처에 있는 공원에 나갔다고 했다. 저녁을 함께 먹은 ‘아내의 친한 언니’의 딸도 소윤이와 나이가 같은데, 처음에는 서먹하더니 나중에는 금방 친해져서 서로 연락하자고 하면서 헤어졌다고 했다. 아내의 친한 언니의 딸은 휴대폰이 있고 소윤이는 없다. 아내의 친한 언니의 딸은, 나중에 연락을 하라고 하면서 종이에 자기 번호를 적어서 줬다고 했다. 아내의 휴대폰 번호도 받아 가고. 할머니 집으로 돌아온 소윤이는 아내의 휴대폰을 빌려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공원에서 만나는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소윤이는 이번 여행(?)이 얼마나 재밌고 특별한 시간일까. 아내가 전해 주는 소윤이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다 기분이 좋아졌다.


“여보. 집에 나 혼자잖아? 그런데도 현상유지를 하려면 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네?”

“여보. 알겠지? 내가 평소에 얼마나 애를 쓰는지?”

“그러니까 말이야”


평소에도 아내의 고초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가 머문 자리의 흔적을 치우고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최소화 하게 되고 애초에 정리할 일을 만들지 않는 움직임을 하게 된다.


여보. 대단한 사람이었네,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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