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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23. 2024

뭐, 여보가 고기가 먹고 싶다고?

23.07.18(화)

서윤이도 한 때는 나만 보면 달려들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너무 튕기는 시기다. 오라 그러면 괜히 더 안 오고 뽀뽀도 잘 안 하고. 그나마 요즘은 가장 심할 때는 조금 지나서 한 번씩 자기가 먼저 와서 안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성에 차지 않는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아빠를 찾는 시기가 온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당장 아쉬울 때가 많다. 아침에 눈을 떠서 처음 만났을 때도 어찌나 비싸게 구는지. 밤마다 자기를 얼마나 쓰다듬고 쳐다보는지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아내가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일찌감치 전화를 해서 오늘 저녁 음식을 얘기했다. 고기를 구워 먹자고 했다. 아마도 고기 애호가인 남편을 위한 ‘비정기적인 정기적’ 편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집에 고기 냄새가 나고 바닥에 기름이 튀어서 미끈거리면 큰 일이 나는 것처럼 생각했던 아내도 많이 변했다. 남편을 위해 변해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굳이 고기를 먹자고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아내와 아이들은 계속 집에 있다가 오후 늦게 장을 보러 나갔다고 했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함께 처치홈스쿨을 하는 선생님 집에 들러서 물건 전달도 했고. 아내가 장을 보러 갔을 때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때 나는 교회에 있었고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 한 상태였다. 아내가 30-40분 정도 후에 집에 간다고 해서 나도 서둘러서 짐을 쌌다. 다른 이유는 없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겠지만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의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다. 마치 한낮의 짧은 쪽잠처럼, 아주 만족스럽고 달콤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지난주에 혼자 보냈던 시간이 나도 모르게 그리웠나.


아내와 아이들이 오자마자 바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먼저 구워줬다. 아내도 쌈과 찬 같은 부재료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뒤에 바로 앉았다. 나는 마지막 고기와 야채까지 굽고 앉았다. 고기 양이 적지 않았는데 오늘은 잘 먹는 날이었다. 나는 편차가 거의 없는 편이고, 아이들과 아내는 날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아내와 아이들 모두 잘 먹는 날이었다. 아내는 고기를 먹기 전부터


“여보. 오늘은 고기가 너무 먹고 싶네”


라고 얘기했다. 아내가 고기가 당긴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굉장히 희귀한 모습이다. 정말 잘 먹었다. 물론 고기보다 훨씬 많은 풍성한 야채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모두 배불리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생미나리를 막 집어먹었다. 장 볼 때 산 과자도 조금씩 먹었다. 죠리퐁처럼 생겼지만 훨씬 담백한, 나름 건강한 과자였다. 오늘 조금만 먹고 내일 우유에 타서 먹겠다고 하면서 두 주먹 정도만 덜어내고 나머지는 아내에게 맡겼다. 우리 집에서는 너무 익숙한 광경이라 그렇지 기본적인 절제와 인내가 또래에 비하면 몸에 많이 뱄다는 걸 문득 문득 느낀다.


고기를 먹어서 그런지 몸이 무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엉덩이가 무거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내도 나도.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에게도 약간의 여유시간이 생겼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계속 흥분 상태였다. 틈만 나면 뛰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서 ‘에너지 기본 분출량’을 충족하지 못한 건가. 층간소음 걱정 없는 집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 웬만하면 뛰어도 별 말을 안 하지만, 아예 운동장에서 뛰듯이 할 때는 제지를 하는 편이다. 서로 부딪히거나 어딘가에 부딪혀서 다치는 상황이 생길까 봐. 그래도 오늘 은 흥분도가 높았지만 말도 잘 들었다. 서윤이는 낮잠을 안 자서 점점 시들어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각각 혼자 샤워를 했다. 소윤이는 너무 오래 걸렸다. 거의 30분을 했다. 고민을 하다가 ‘너무 오래 걸리니 다음부터는 조금 더 부지런히 해 봐’라고 얘기했다. 고민의 지점은 여러 개였다. 우선 항상 아이들에게 ‘꼼꼼히’를 주문한다. ‘꼼꼼히 구석구석 씻어라’가 빠지지 않는 주문사항이다. ‘꼼꼼히’와 ‘빠르게’는 어쩔 수 없이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 ‘꼼꼼하지만 부지런하고 빠르게’라는 잡탕 주문을 하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고민의 지점은 소윤이가 ‘여자’라는 거다. 남자의 샤워는 마음만 먹으면 3분 안에도 가능하다. 나야 샤워시간을 소중한 쉼과 휴식의 시간으로 활용하다 보니 더 오래 걸리지만 마음만 먹으면, 적어도 수건으로 닦기 전까지는 3분 안에 마무리가 가능하다. 여자의 샤워는 내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남자보다는 더 걸리지 않을까 싶다. 머리도 훨씬 오래 감아야 하고, 또 기본적으로 훨씬 꼼꼼하게 하니까. 이미 소윤이는 나보다 더 꼼꼼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무작정 ‘빨리 씻고 나와’라고 하기가 좀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시계를 봤을 때는 ‘어? 오늘은 좀 빠르네. 여유가 있네’ 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씻고 나와서 잘 준비를 마쳤을 때 시계를 보니 ‘뭐야? 벌써 이렇게 됐어? 별 차이 없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어제 나에게 허락 아닌 허락을 구했다. 실내 자전거를 나눔으로 받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냐는 거였다. 집에 뭔가 더 들이거나 비치하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먼저 의사를 묻는 거였다. 그게 우리 집에 꼭 필요한 거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실내 자전거라는 특수성이 있다 보니 그런 거였다. 그렇게라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아내의 의지였다. 수많은 실내 자전거의 최후가 빨래걸이 혹은 수건걸이로 귀결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이유로 아내의 운동 의지를 꺾는 건 아내를 너무 존중하지 않는 태도였다. 기꺼이 아내의 의지를 존중했다. 오전에 일을 하다 말고 그 실내 자전거를 받으러 다녀왔다. 퇴근하고 집에 가지고 올라와서 안방에 들여놨다. 아내는 내가 헬스장에 가면서부터 그걸 타기 시작했는데 내가 갔다 왔을 때도 타고 있었다. 심지어 그 뒤로도 한참을 더 탔다.


“여보. 첫날 그렇게 하면 안 돼. 첫날의 의지로 다 불태우면 안 돼. 길게 갸야지”


과연, 우리 집에 입양된 실내 자전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수많은 자기 동족이 그랬던 것처럼 가동 기능을 잊고 거치 기능에 특화되어 살다가 ‘몇 번 사용 안 했어요. 상태 좋아요’라는 설명과 함께 또 누군가에게 입양될 것인지, 아니면 희귀하지만 너무 많이 사용해서 더 이상 사용이 안 될 정도로 영광스러운 노쇠의 길을 걸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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