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깨아빠 Jan 23. 2024

끝나지 않는 원격 훈육

23.07.20(목)

아내와 아이들은 소윤이 피아노 수업이 있어서 교회에 가야 했다. 출근하기 전에 아이들이 모두 깼다. 시윤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잠이 덜 깬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차이가 있었다. 표정에 은근한 불쾌감(?) 같은 게 드러났고 왠지 모를 짜증이 느껴졌다. 보통은 현관에서 인사를 하고 나면 베란다로 가서 2차 인사도 하는데 오늘은 베란다에 나오지도 않았다. 불길한 분석과 예감은 적중했다.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시윤이가 아침부터 막무가내로 짜증을 내는데 어떻게 해야겠냐는 거였다. 나에게도 해답지는 없다. 아내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을 법한 답변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아내는 교회에 가면서 물놀이 짐도 챙겼다고 했다. 교회 마당에 설치된 간이 수영장에는 아직도 물이 받아져 있었고, 아내는 아이들의 바람에 응답하는 차원에서 물놀이 짐을 챙긴 거다. 소윤이의 피아노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물놀이를 할 생각이었던 거다. 아내는 조금 두렵다고도 했다. 바닷가나 다른 곳에서 하는 물놀이에 비하면 굉장히 수월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남편 없이 혼자 물놀이를 하는 건 언제나 두려움을 초래하는 일이기는 하다.


오후에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열심히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받았다. 수영장이 엄청 넓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들만 놀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동영상도 받았다. 재밌게 노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단조로워 보이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이 있었으면 훨씬 재밌었을 것 같다. 그래도 2시간을 꽉 채워서 재밌게 놀았다고 했다. 더 놀면 너무 추울까 봐 그 정도에서 끝냈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아내와 통화를 했을 때, 아내와 아이들은 막 집에 도착했다고 했다. 난 좀 먼 곳에 있어서 집까지 가려면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아내와 통화를 마치고 5분도 안 돼서 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시윤이가 또 억지를 부리면서 짜증을 낸다는 거였다. 나도 순간 짜증이 팍 났다. 뭐랄까, 떨어져 있는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지’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일단 시윤이를 바꿔달라고 했다. 아내와 더 통화를 하면 괜히 아내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것 같았다. 시윤이를 잘 타일렀다. 통화를 마치고 시윤이가 극적으로 변해서 바른 태도가 되었을지 아니면 그 뒤로도 한참 아내를 힘들게 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이지 않았을까 싶기는 했다. 그리고 퇴근해서 마주한 아내의 모습과 기운으로 유추해 봐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아내는 오랜만에 온몸과 말투에 차가움과 퉁명스러움을 장착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지침’이었다.


아내는 성경공부 모임이 있어서 교회에 갔다. 아이들 저녁으로는 소고기를 구워줬다. 아내가 사 놓은 소량의 소고기가 있었다. 한 끼 반찬으로 딱 좋을 만한 양이었다. 고기 말고는 마땅한 반찬이 없었다. 며칠 전에 돈까스덮밥을 해 줬을 때 만들었던 계란+양파 볶음과 그저께 고기 먹었을 때 남은 미나리를 꺼내줬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기에는 소고기가 꽤 좋은 반찬이었지만 어쨌든 다들 잘 먹었다. 시윤이는 고기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두 번이나 밥을 더 채워서 먹었다.


“시윤아. 고기는 없어. 같이 먹을 반찬이 없는데?”

“미나리에 쌈장 찍어서 먹으면 돼여”


시윤이는 생미나리에 쌈장을 퍽퍽 찍어서 먹었다.


아이들은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고, 저녁 먹고 난 뒤에는 양치만 하면 됐다. 세상에 이토록 감사하고 기쁜 일이 없다. 양치만 하고 누우면 끝이라니. 서윤이는 오늘도 낮잠을 안 잤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물놀이를 해서 그런지 유독 더 피곤해 보였다. 아이들이 양치를 하는 동안 나도 부지런히 설거짓거리를 정리했다. 식기세척기에 넣기 전에  간단히 애벌 설거지를 했다. 보통은 아이들이 눕고 나면 집안일을 하는데 오늘은 그 전에 끝내려고 애를 썼다. 이유가 있었다. 아이들만 저녁을 먹었고, 난 아직 안 먹은 상태였다. 라면을 끓여 먹을 생각이었는데, 기분 좋게 먹고 나서 쌓인 설거지를 보며 압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깨끗하고 압박 없는 주방을 보며 라면을 먹고 싶었다.


아이들은 모두 누웠고, 주방도 제법 깨끗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냄비에 물을 받아서 끓이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택근무를 들켜버렸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