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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24. 2024

기다려 주지 않는 배고픔

23.07.24(월)

하루 종일 아내와 특별한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둘 중 하나다. 연락할 틈도 없이 바쁘거나 너무 평온해서 남편 생각이 많이 나지 않거나. 그동안의 경험을 근거로 유추해 보자면 대체로 전자일 경우가 많기는 했다. 오늘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후. 서윤이 낮잠 너무 안 자네”


아내의 분노가 살짝 느껴지는 메시지를 오후에 받았다. 무슨 짓을 해도 탄탄한 사랑에 기반한 무한한 수용의 혜택을 누리는 막내라고 해도 ‘잠’의 문제가 걸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녀가 자랄수록 낮잠의 시간도 짧아지고 건너뛰는 날도 많아지는 게 당연하다. 더군다나 내 자녀들은 잠이 많은 편이 아니기도 하고. 서윤이도 비슷하다. 낮잠은 밤잠과는 다르게 함께 들어가서 누워있어야 하다 보니 아내가 좀 열이 받은 듯했다. 서윤이도 점점 낮잠과 멀어지는 수순을 밟지 않을까 싶다.


퇴근하고 만난 아내는 지쳐 보이기는 했지만 탈탈 털린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일상의 피로인데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이는 정도였다. 아이들 상태도 괜찮아 보였다. 물론 내가 모르는 크고 비밀스러운 일들이 이미 다 정리가 된 뒤였을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은 삼계탕이었다. 아내는 어제


“여보. 올 시간에 맞춰서 최대한 미리 해 놔야겠다”


라고 얘기했다. 나는


“여보. 그냥 나 가면 같이 해”


대답했고. 아내가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뭐 엄청 늦게 퇴근하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치열한 오후 육아의 일상을 보내다 보면 ‘어? 벌써 이렇게 됐나?’ 할 때가 대부분이니까. 괜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느끼느니 애초에 마음 편히 먹고 포기하는 편이 낫다. 말은 이렇게 했는데, 막상 퇴근하고 나니 너무 배가 고팠다. 아내는 찹쌀밥에 들어갈 야채를 손질했고, 난 삼계탕에 들어갈 전복과 삼계탕을 손질했다. 전복은 껍질과 분리해서 내장과 이빨을 떼어내고 박박 씻으면 된다. 닭은 삼계탕용으로 손질이 된 닭이었지만 아내는 텅 빈 닭 속에 손을 넣어서 남은 핏덩어리나 기름 찌꺼기를 제거하기를 원했다. 가영이 남편 10년이면 시키지 않아도 온갖 잡내 제거에 신경을 쓰게 된다. 닭 요리를 하면 닭 냄새가 나기 마련이고, 돼지 요리를 하면 돼지 냄새가 나기 마련이라는 게 나의 철학이지만 아내는 결코 그렇지 않다. 입에 넣어 식감으로 느끼기 전에 후각으로 재료를 판별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는다. 닭 똥구멍에 손을 넣어서 검지와 중지로 척추뼈에 붙어 있는(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핏덩어리를 비롯한 왠지 없애야 할 것 같은 것들을 박박 긁어냈다.


준비를 하면서 배고픔이 깊어졌다. 배고픔이 깊어지니 다소 침울해졌다. 아내가 보기에는 뭔가 화가 났나 싶을 정도였나 보다. 아내는 괜히 미안해했다. 자기가 저녁 준비를 제 때 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아내에게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배가 고팠을 뿐이다.


닭은 물론이고 낙지와 전복까지 들어간, 엄청난 보양식이었다. 밖에서는 ‘해신탕’이라는 이름으로 팔릴 법한 음식이었다. 서윤이는 낙지를 엄청 잘 먹었다. 그 중에도 선호하는 부위가 있었다.


“아빠. 저거 하얀 거 주세여어”


다리 부분이 아닌, 머리(라고 하는 게 맞나?)에 가까운 부위의 조금 더 꼬독꼬독한 부분을 좋아했다. 집요하게 ‘하얀 거’만 찾아서 먹었다. 서윤이도 나름 취향이 분명하다. ‘하얀 거’를 꼭 ‘소금참기름장’에 찍어 먹었다. 소윤이의 어릴 때와는 조금 다르다. 소윤이는 맛 때문에 먹는다기 보다 ‘찍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푹 담갔다. 그에 비해 서윤이는 아주 살짝만 찍어서 먹었다. 마치 풍미의 증진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하는 것처럼. 서윤이가 낙지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


커다란 닭을 두 마리나 삶았으니 꽤 푸짐한 양이었다. 한 마리는 거의 그대로 남았다. 살만 발라서 냉장고에 넣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소중한 내일의 양식이다. 비록 한 끼에 끝날 만한 양이라고 할 지라도 소중한 자원이었다.


시윤이는 기침이 엄청 심했다. 코맹맹이 소리도 여전했고. 밤이 되니 기침이 더 심해졌다. 자다가도 몇 번을 나와서 가래를 뱉고 다시 들어갔다. 마치 호흡기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잦은 기침을 했다. 목도 많이 아프다고 했다. 상태는 괜찮아졌지만 증상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보통 시윤이의 질병 흐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라 생소하긴 했다. 기침을 너무 많이 하니까 ‘내일은 병원에 데리고 가 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중에도 세 번이나 나와서 가래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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