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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Jan 25. 2024

총체적 우울함

23.07.27(목)

시윤이가 어제 자다가 깨서 기침을 막 하다가 코피를 쏟았다. 멈추지 않고 줄줄 흐른 건 아니었고, 아마도 기침을 하다 보니 자극이 돼서 그런 것 같았다. 시윤이는 코도 꽉 막혀 있는 게 비염처럼 점막이 약해져 있는 듯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얼굴이 벌개지도록 기침을 하면서 코피를 흘리니 조금 놀라기는 했다. 의외로 시윤이는 덤덤했다.


안방에서 자다가 새벽에 너무 더워서 베개를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그때가 한 4시 쯤이었다. 금방 다시 잠들었고 체감상으로는 얼마 안 돼서 다시 잠이 깼다. 잠깐인 듯했는데 3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잠이 깬 건 시윤이 기침소리 때문이었다. 어제처럼 기침을 많이 했다.


“시윤아. 거실로 나올래?”


시윤이가 거실로 나와서 앉자마자 또 코피가 흘렀다. 어제와 비슷했다. 시윤이는 기침을 많이 하는 것 말고는 힘든 건 없다고 했다. 목도 안 아프고. ‘어제 병원에 데리고 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시 또 코피가 날 지 모르니 휴지를 말아서 코에 넣어줬는데, 시윤이는 이런 걸 정말 못 참는다. 그나마 내가 넣어줬으니 조금 하고 있었지 아내가 그랬으면 바로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걸리적거리고 불편하다고 하면서.


시윤이의 코피가 이곳저곳에 흥건하지는 않았다. 베갯잇과 이불, 그리고 옷에 조금씩 묻었다. 아내는 일어나서 그간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시윤이를 걱정했다.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시윤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서 피가 묻은 이불과 베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너무 부지런히 움직여서 그랬을까. 아내에게서 왠지 모를 냉랭함과 우울이 느껴졌다. 출근하려고 현관에 서서 차례대로 뽀뽀를 나눴다. 아내에게는 한마디를 더 건넸다.


“여보. 많이 웃어”


아내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아내가 서운하거나 기분 나쁘게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꼭 그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출근하고 1시간 쯤 지났을 때,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열심히 웃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전에 교회에 가야 했다. 소윤이 피아노 수업이 있었다. 나도 오전에는 교회에서 일을 했다. 아내는 소윤이가 피아노 수업을 하는 동안 시윤이와 서윤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시윤이는 예상했던 대로, 특별한 점은 없었다. 가래가 많이 꼈고, 비염도 심한 상태라고 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역시나’ 싶기도 했다. 서윤이도 어제 밤에 기침을 조금 하길래 진료를 봤는데 거의 정상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내는 소윤이 피아노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병원에 간다고 했다. 아직 유치가 안 빠졌는데 잇몸을 뚫고 나온 시윤이의 영구치를 해결하기 위한 치과, 허벅지에 자그맣게 생긴 소윤이의 사마귀를 해결하기 위한 피부과에 간다고 했다. 무더운 날씨에 두 곳의 병원을 세 자녀와 함께 가야 하는 일이 만만하지는 않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서 나왔다.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병원으로, 나는 다른 일을 하러.


아내에게 금방 전화가 왔다. 시윤이 치과가 더 급하다고 생각해서 거기부터 갔는데 하필 오늘 휴진이라고 했다. 소윤이 피부과도 갔고, 오늘 바로 사마귀를 제거했다고 했다. 마취주사를 맞을 때 엄청 울었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자연드림에 들러서 장을 본 것으로 아내와 아이들의 바깥 일정은 끝이었다. 그 이후로는 계속 집에 있었다. 난 평소에 비해 퇴근이 좀 늦었다. 대한민국 평균에 비하면 항상 빠른 편인데, 오히려 이게 독 아닌 독이 될 때도 있다. 오늘처럼 조금 늦는 날에, 아내는 체감상, 남편이 마치 야근을 하고 오는 것처럼 느끼는 듯하다. 몇 시 쯤, 언제 쯤 도착하는지 확인하는 아내의 목소리에서 ‘마르고 지침’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의 분위기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일상이었다. 다소 지친 아내의 표정과 말투, 잔잔한 병치레로 가중된 피로 덕분에 다소 활력이 없고 쳐진 자녀들, 이런 상황에서 광대가 되어서 기꺼이 분위기를 전환시켜 보려는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내가 만들어 내는 종합적인 우중충한 분위기랄까. 더군다나 시윤이는 여전히 기침이 심했고, 여기에 소윤이까지 가세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열이 날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기침-발열-몸살’로 이어지는 그간의 징후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내도 그럴 만했다.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면서 세 군데의 병원을 들렀고, 하루 종일 온전히 혼자 육아의 시간을 감당한 셈이었다. 내가 퇴근했을 때 아이들은 저녁을 먹은 건 물론이고 씻고 잘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지치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기는 했다. 내가 조금 더 웃음 유발자가 되어서 희생(?)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순간에는 나도 퇴근 후 남편과 아빠의 역할로 전환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괜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퇴근했을 때 우울한 분위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내에게 모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내를 막 이해하고 보듬어 주지도 못했다.


소윤이는 밤이 되니 증상이 더 심해졌다. 자다가 깨서 짜증을 막 냈다. 코도 막히고 기침도 나오니까 견디기가 힘들었나 보다. 발길질을 하면서 있는 대로 짜증을 냈다. 가만히 듣다가 한마디 했다.


“소윤아. 짜증은 그만 내. 힘든 게 있으면 얘기를 하거나 일어나서 나오면 되지. 짜증은 내지 마”


소윤이는 서운했을 거다. 이럴 때 ‘아이고 힘들지. 그래그래. 너무 힘들겠다’라고 하면서 품어주면 참 좋을 텐데. 그것도 왜 그렇게 안 되는지. 나도 짜증 많이 내면서, 잠결에 아파서 내는 짜증도 왜 못 받아 주는지.


이래서 어른들이 ‘너무 그러지 마라’, ‘그때가 제일 좋을 때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 건가. 미안한 마음에 소윤이를 안방으로 불렀다. 아내의 옆자리를 소윤이에게 내어주고, 난 작은방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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