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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Feb 01. 2024

엄마 없는 하루

23.08.01(화)

아내는 일찍부터 준비해서 나갔다. 사실 계획한 시간보다 늦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확한 시간에 딱 맞춰서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나와 아이들만의 시간이었다. 우선 아침을 차려줬다. 교회에서 받은 미역국이 있었다. 진정한 일용할 양식이었다. 심지어 맛도 환상적이라 아이들 모두


“와, 아빠. 미역국 너무 맛있다여”


를 연발하며 먹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뿌듯하고 든든했다.


오전 시간에는 의외로 한가했다.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책을 읽었고 난 일기를 썼다. 서윤이만 한 번씩 나에게 와서 안겼다가 가고 그랬다. 물론 오후에 ‘익스트림’한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나에게 와서 ‘오늘은 뭘 할 건지’, ‘어디라도 가자든지’하는 소리를 안 했을 거다.


오후에는 원래 바닷가에 가려고 했다. 나처럼 아내를 떠나보낸 K와 그의 자녀들과 함께(아내는 K의 아내와 함께 Y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멀리). 오후에 만나기로 했는데 K에게 연락이 왔다. K의 둘째가 눈병이 좀 났는데 바닷가에 들어가면 더 심해질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첫 통화에서는 딱히 계획을 변경하거나 그러지 않고 상황만 공유했다. 바닷가의 대안을 생각했다. 밖에서 놀기에는 날이 너무 뜨거웠다. 실내라면 바닷가만큼 아이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몇 번 갔던 실내 놀이터가 생각났다. 우선 소윤이와 시윤이의 의견을 물었다.


“얘들아. 00이가 눈병이 나서 바닷가에 가기는 좀 어려울 거 같대. 너희는 그냥 우리끼리 바닷가에 가는 게 좋아, 아니면 00이네랑 같이 000000 가는 게 좋아?”


소윤이와 시윤이는 잠시 고민하고, 금방 결론을 도출했다.


“아빠. 바닷가 안 가도 돼여. 00이네랑 같이 000000 가는 거면 괜찮아여”


평일이었는데 사람이 엄청 많았다. 휴가철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의외로 금방 자리가 났다. 서윤이는 잠들어 있었다. K의 막내도 졸음이 쏟아지는 듯했다. K가 1층에서 막내를 재우며 서윤이 유모차를 지켜주기로 했다. 난 나머지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올라갔다. 크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야말로 보호자였다. 아이들을 계속 주시하고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본질의 임무였다. 소윤이와 K의 첫째, 시윤이는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가는 것만 아니면 어느 정도 시야에서 벗어나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K의 둘째는 아직 그것보다는 어려서 계속 옆에 붙어 있었다.


오늘도 K의 첫째와 시윤이의 죽이 척척 맞았다. 누나의 남자친구와 친해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런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둘이 엄청 잘 논다. 종종 감정이 충돌하거나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둘이 놀 때 즐거움이 더 많이 생산되나 보다. 덕분에 소윤이가 독자노선을 걸을 때가 많다. 오늘도 소윤이는 K의 둘째를 챙기는 데 더 집중했다.


1시간 쯤 지났을 때 K도 올라왔다. 서윤이는 잠에서 깼고, K의 막내는 아직 안 잤다고 했다. 서윤이는 나에게 안기며 얘기했다.


“아빠. 근데 저 유모차에서 자다 깼을 때 아빠 없어서 울 뻔 했다여”

“진짜? 아빠 없어서 놀랐어?”

“네”

“00 삼촌 있어서 괜찮지 않았어?”

“아니여”


요즘 괜히 튕길 때가 많기는 하지만 내가 이 녀석에게 투자한 땀과 눈물, 시간이 있다. 서윤이 정서의 근간을 떠받치는 핵심 요소라고 믿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저 대화에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내가 보기에 소윤이나 K의 첫째에게는 조금 유치한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 항상 엄청 재밌게 잘 논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쉬지도 않고 계속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K는 막내가 품에 안겨서 잠든 바람에 막내를 안고 있느라 애를 썼다. 내가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핵심 보호자가 되기도 했다.


K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는 일정이었고, K의 집에 가서 저녁도 함께 먹고 아이들은 영화도 보여줄까 얘기를 했지만 왠지 오늘은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서윤이가 좋아하는 ‘범퍼카’도 태워주고 싶었다(언니와 오빠가 그걸 탈 때는 서윤이가 자고 있었다). 거기서 헤어지기로 했다. K네 식구가 먼저 떠나고 우리는 조금 더 머물렀다. 오늘은 범퍼카를 조금밖에 운영을 안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서윤이도 한 번 밖에 못 탔다.


“아빠. 검퍼카(오타 아님) 너무 재밌어여어”


밖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다가 집으로 갈까 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아이들의 허기였다. 점심에 주먹밥을 만들어서 먹이고 나왔는데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자연스레 조금씩만 먹었다. 그러다 보니 저녁에는 또 허기가 깊어진 거다. 밖에서 밥을 사 먹는 건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돈을 쓰는 것도 아깝고, 식당에 들어갔을 때의 내 모습을 그려보니 더더욱 그랬다.


일단 근처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빵으로 당장의 허기만 조금 달랬다. 집에 가서 뭘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아내가 사 놓은 콩국물이 생각났다.


“얘들아. 우리 집에 가서 콩국수 먹자. 어때?”

“좋아여”


서윤이는 콩국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나는 콩국수 안 좋아하는데?”

“서윤아. 오늘은 그래도 한 번 먹어보자. 아빠가 맛있게 해 줄게”

“그래여”


집 앞에 택배 물품 세 개가 있었다. 두 개는 상자였고, 하나는 봉투였다. 소윤이가 관심을 보였다.


“아빠. 이게 뭐예여?”

“글쎄. 엄마가 뭐 시키셨나?”


엄청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소윤이는 유독 택배 상자에 관한 관심을 드러냈다. 뭐냐고 또 물어보고, 자기가 뜯어보면 안 되냐고 물어보고.


“소윤아. 엄마가 뭐 시키셨나 보지. 이제 그만 얘기해”


다소 퉁명스럽게 소윤이에게 얘기했고, 소윤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택배 상자와 봉투를 주방으로 가지고 와서 하나씩 열어봤다. 하나는 라텍스 장갑, 또 하나는 휴지였다. 마지막으로 봉투를 뜯었는데, 맙소사. 그립톡이었다. 곧 다가올 내 생일에 선물로 주려고 소윤이가 준비한 거였다. 오래전부터 소윤이가 나에게 그립톡을 사 주려고 했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못 사고 있었고, 생일선물로 뭘 받고 싶냐는 소윤이의 물음에 ‘그립톡’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아차’ 싶었다. 소윤이가 유독 집착(?)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일단 소윤이가 보지는 못했다. 봉투를 뜯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봉투를 다시 둘둘 감았다. 마침 그때 소윤이가 주방으로 왔다. 소윤이는 별 말 없이 나를 지켜봤다. 아마도 또 택배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 한 소리를 들을까 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택배 봉투를 찬장에 넣었다. 다행히 소윤이도, 내가 봤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딸보다 속이 깊지 못한 아빠 같으니라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윤이와 시윤이는 알아서 샤워를 하라고 했고, 그 사이에 난 콩국수를 준비했다. 나름 정성을 들였다. 오이와 사과, 토마토를 썰어서 고명으로 올렸다. 다들 배가 많이 고프다고 해서 국수 한 봉지를 모두 삶았는데 너무 많았나 보다. 소윤이는 꽤 많이 남겼다.


“아빠. 저는 콩국수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 거 같아여”


오히려 서윤이가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자기도 이제 콩국수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면서. 시윤이야 말 할 것도 없이 잘 먹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는 영상을 봤다. ‘나니아 연대기:새벽출정호의 항해’를 1시간 정도만 보고 나머지는 다음에 보는 걸 먼저 제안했다. 평소에 아이들이 보고 싶어 했던 영화였다. 1시간만 보고 끊는다는 게 조금 별로였는지 다른 영상을 보자고 했다. ‘동물의 왕국’을 제안했고 모두 흔쾌히 수락했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나오는 걸 틀어주고 난 팝콘을 만들었는데 처음으로 태웠다. 처음부터 불을 너무 세게 올렸는지 탄 게 꽤 많았다. 그래도 전부 탄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탄 건 골라내고 설탕까지 녹여서 캬라멜 팝콘을 만들어줬다. 서윤이는 받자마자 순식간에 다 먹었고, 시윤이는 그 다음으로, 소윤이는 영상이 끝날 때까지 팝콘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을 눕히고 나서 설거지를 했다. 주방 정리도 하고. 아내는 꽤 늦게 왔다. 아침 일찍 헤어지고 밤 늦게 만나서 그랬는지 오늘따라 아내가 무척 반가웠다. 반갑기도 하면서 뭔가 마음도 놓이고, 든든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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