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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Feb 04. 2024

강행군의 여파

23.08.03(목)

휴가였지만 오후에 일정이 하나 있었다. 오후 전체를 보내야 하는 일정이었다. 오전에는 집에서 나가기 직전까지 누워서 빈둥거렸다. 오후에 일을 하러 나갈 생각을 하니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휴가에 젖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 남편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오전에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오후 일정을 마치고 오랜만에 퇴근(?)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주방에서 은밀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다. 둘이 킥킥대면서. 아내와 서윤이는 안 보였다.


“엄마랑 서윤이는?”

“아직 자여”

“한참 됐어?”

“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내에게 줄 간식(?)을 만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호박과 수박을 으깨서 그 즙을 우유에 섞고 있었다. 아내가 서윤이와 낮잠을 자면 종종 했던 일이었다. 안타까운 건, 그렇게 만든 것 중에 버려진 것도 많다는 거다. 아내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을 구현했을 때도 많았다. 아이들의 마음과 정성이 있으니 대놓고 ‘이런 건 하지 마라’고 말을 못 할 때가 대부분이었고. 오늘은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우유에 단호박, 수박은 그래도 조금 익숙한 맛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내와 서윤이는 내가 퇴근하고도 조금 더 있다가 깼다. 아내는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었는데 뭔가 계속 찌뿌둥하다고 했다.


“여보. 우리 저녁 밖에 나가서 먹을까?”

“그럴까?”

“응. 밥을 할 힘이 없네”


몇 개의 후보지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소윤이가 새로운 후보를 제안했다.


“아빠. 찜닭 먹고 싶어여”


아내가 엄청 선호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기꺼이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도 찜닭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밖에서 먹는 찜닭은 너무 자극적이라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음식은 아니다.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어서 ‘오늘은 어제만큼 안 덥나?’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엄청 더웠다. 해가 지고 나서 나왔는데도 역시나 무더웠다. 거의 세 시간을 자고 나온 아내는 차에 타자 또 졸았다. 그렇게 자고도 또 졸리다는 건 뭔가 몸이 안 좋다는 얘기였다. 딱히 느껴지는 증상은 없다고 했다. 그냥 뻐근하고 피곤하다고 했다. 휴가였지만 강행군의 연속인 날들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시댁 식구들을 치르고 나서 곧바로 먼 거리에 있는 친구도 보러 다녀오고 그 다음 날은 바닷가에 가서 물놀이도 하고. 쓰면서 생각해 보니 피곤할 만한 여정이기는 했다.


아이들을 위해 뼈가 없고 매운 맛이 전혀 없는 찜닭을 주문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 모두 잘 먹었다. 역시나 너무 자극적이어서 아이들이 잘 먹는 게 왠지 모르게 불편했지만 어쨌든 한 끼를 잘 해결했다.


막연히 시간이 얼마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의외로 늦은 시간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회복이 안 된 상태였다. 어젯밤에 한 숨도 못 자고 오늘도 전혀 잠을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해했다. 아이들이 씻는 동안 아내에게도 씻으라고 했다. 낮에 3시간을 잤으니 잠은 안 오더라도 누워서 쉬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여보. 들어가서 누워 있기는 할 건데 잠은 안 올 거 같아”


나도 아내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눕히고 얼마 안 지나서 안방을 들여다 봤는데 아내가 자고 있었다. 3시간을 자고도 바로 그렇게 잠들 줄은 몰랐다. 두통도 조금 있다고 했고, 기침도 조금 했는데 이게 뭔가 우리 집을 지배하고 있는 병의 기운이다. 아이들도 모두 비슷하다.


아내의 상태가 안 좋았던 만큼 거실과 주방의 상태는 처참했다. 아내는 그냥 두라고 했지만 차마 그러기가 어려웠다. 거실에 널브러진 것들부터 치우고, 싱크대에 있는 설거지도 하고 주방 정리도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음식물 쓰레기도 정리(?)를 해서 내 놓고 왔다. 에어컨을 틀고 있었는데도 땀이 삐질 흐를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래도 감사했다. 내일 출근이 아닌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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