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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Feb 05. 2024

갑자기 우리도 같이?

23.08.08(화)

오랜만의 출근이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사실 휴가 기간에도 이른 시간에 눈을 떴을 때가 많기는 했다. 그때(라고 해 봐야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여유롭게 다시 눈을 감거나 휴대폰을 조금 만지작거리다 다시 잠들었다면, 오늘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꽤 이른 시간이라 모두 자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의 기척을 느끼고 깨지 않도록 조심히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소윤이가 가장 먼저 깨서 나왔다. 소윤이에게 아내 옆에 누워서 조금 더 자라고 했더니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소윤이가 깨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윤이와 서윤이도 나왔다. 내가 있어서 일찍 깬 건 아니었을 거다. 아내와 나와는 반대로 아이들은 나의 휴가기간에 일찍 일어난 날이 많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공부방으로 들어가서 각자의 할 일을 마친 다음 바로 슬라임을 집어들었다. 어제 함께 처치홈스쿨 하는 선생님네 집에 잠깐 들렀을 때 슬라임을 받았다. 소윤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하고 싶어 했지만 아내와 내가 직접 돈을 들여 사 준 적은 없었다. 한 번 쯤 사 줄 법도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만큼 소윤이의 슬라임을 향한 갈망은 항상 잠재되어 있었다. 오늘 그 슬라임이 혹시나 평화를 깨는 불씨가 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을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랜만에 교회에서 하루를 보냈다. 처치홈스쿨은 여전히 방학기간이었지만 오랜만에 엄마 선생님들이 모여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나도 오전에는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잠깐 바깥 일정을 하러 나갔다 왔다. 점심시간 즈음에 돌아왔는데 시윤이가 울상이었다. 내가 오기 전부터 계속 아내 옆에 붙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시윤이를 불러서 무릎에 앉히고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봤다. 시윤이는 아무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진실이 아니었다. 시윤이가 아무 이유없이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히 무언가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걸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 아내는 점심을 준비하느라 정확한 상황을 보지 못한 듯했다. 목격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시윤이의 그런 모습에 약간 신물이 났는지 ‘또 그런다’는 반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소윤이에게 물어보면 혹시 알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윤이에게 차분하게 설명하고 시윤이가 먼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왜 그런지는 생각은 안 나는데 속상한 게 쌓여서 그랬어여”


진짜 생각이 안 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속상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고 얘기한 것만으로도 성과(?)였다. 시윤이를 잘 다독였다. 시윤이는 조금 마음을 풀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뛰어다니며 웃었다. 오늘의 전략은 다행히 성공이었네.


아내는 저녁에 약속이 있었고 난 오후에는 카페에서 일을 했다. 아내가 교회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카페로 나를 데리러 왔다. 이번에는 아내의 얼굴이 영 안 좋았다. 교회에서 나올 때 누군가 강력하게 불평을 하며 좋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차에서는 물론이고 집에 도착해서도 집안 분위기가 영 꽝이었다. 아내는 약속 시간이 임박해서 간단히 재정비만 하고 바로 나갔다. 시윤이는 차에 타는 아내에게, 베란다에 서서 한 마디를 작게 외쳤다.


“엄마. 미안해여”


아내가 못 들었는지 옆에서 소윤이가 대신 확성기 역할을 했다.


“엄마아”

“왜?”

“시윤이가 미안하대여”


아내가 떠나고 소윤이는 슬라임을 가지고 와서 물어봤다.


“아빠. 이거 해도 돼여?”

“어, 그래”


소윤이는 서윤이와 마주앉아서 슬라임을 가지고 놀았다. 엄청 재미있게. 문득 궁금했다. 소윤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슬라임을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소윤이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소윤이만 ‘아직’ 좋아하는 건지. 아무튼 소윤이는 아이처럼(지금도 아이지만)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다. 시윤이는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뒤늦게 합류했다.


난 소파에 앉아서 잠시 충전 중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소불고기를 구워서 아이들 저녁으로 차려줘야 했는데 잠시 쉬고 있었다.


‘아, 이제 일어나서 저녁 차려야 하는데…차려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 왜?”

“여보. 혹시 밥 먹었어요?”

“아니. 이제 차려줘야지”

“아, 여보. 오늘 다 같이 만나는 거였대”

“어?”

“여보랑 애들도 다 같이 보는 거였대”


아내는 교회 사모님을 만나러 간 거였는데 알고 보니 목사님과 사모님, 우리 가족 모두가 만나자고 하신 거였다. 다행히(?) 소윤이와 서윤이는 오늘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시윤이만 내복을 입고 있었다. 급히 채비를 해서 나왔고 아내가 다시 우리를 태우러 왔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주문한 음식이 이미 나와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이 간식을 많이 먹어서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을 거라고 했다. 미리 ‘조금만’ 주문해도 된다고 얘기하지 못한 걸 안타까워 했다. 쓸 데 없는 걱정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민망할 정도로 잘 먹었다. 마치 그런 음식은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듯한 아이들처럼.


내 나름대로는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꽤 낯을 가리는 편인데 목사님과 사모님 앞에서는 굉장히 편안하게 자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거였다. 흔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마치 심리적 거리가 아주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에게 얘기하듯 편안하게 이런저런 주제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꺼냈다. 목사님이나 사모님과 따로 교제를 할 시간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매우 편안하고 친숙하게 목사님과 사모님을 대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목사님과 사모님을 매우 친밀하게 생각한다는 게 느껴졌다. 밥을 먹고 카페로 이동할 때는 셋 모두 목사님과 사모님 차를 탔다.


카페에서 목사님과 사모님은 아이들이 먹을 빵과 아이스크림도 사 주셨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이미 밥을 먹을 때부터 봉인이 해제됐다. 사이다도 마셨고, 사탕도 먹었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었다. 셋 모두 무아지경에 빠진 듯 다소 이성의 끈이 얇아진 듯한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했다. 자기들 먹을 거 다 먹고 나서는 심심하다고 하면서 굉장히 부산스럽게 잔잔한 소란을 피웠다. 아내와 나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목사님과 사모님에게는 깊은 피로감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너무 예뻐해 주셔서 감사했지만.


집에 오니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내는 셋 모두 샤워를 시켰다. 샤워를 하루만 안 해도 찝찝해서 살기 어려운 계절인데 아이들은 샤워를 한 지 벌써 며칠 됐다. 인권 존중의 차원에서 아내가 기꺼이 의지를 내어 아이들을 씻겼다. 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이들을 차례대로 앉혀서 머리를 말려줬다.


“아빠. 제가 말려도 돼여”

“아니야. 아빠가 말려줄게”


소윤이의 달콤한 제안에 넘어갈 뻔했지만 겨우 몸을 일으켜서 드라이기를 잡았다. 그때 일어나지 못했으면 아마도 그대로 졸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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