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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깨아빠 Feb 05. 2024

낮과 밤, 그리고 선풍기

23.08.09(수)

아침에 아내가 폭풍처럼 메시지를 보냈다. 오랜만에, 그러니까 긴 휴가기간을 끝내고 처음으로 (어제는 하루 종일 교회에 있었고) 맞이하는 남편 없는 날이었다. 이게 원래 아내의 일상인데 너무 오랜만이라 일상이 아닌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난 치열한 육아의 일상이 쉽지 많은 않았나 보다. 아내는 연달아서 몇 개의 메시지를 주르륵 보냈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몸도 마음도. 아내의 많은 메시지에 따로 답장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했다.


오전에 잠깐 차를 고치러 가야 해서 교회에 있다가 집에 들렀다. 아내와 시윤이는 식탁에 앉아서 대치(?)중이었다. 시윤이가 뭔가를 잘못한 듯했고, 아내는 시윤이에게 큰 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을 때의 국면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고, 이건 또 다른 상황이었던 거다. 아주 큰 파도를 넘고 나면 이제 좀 잔잔한 물결이 와야 하는데 파도를 넘고 나니 또 파도가 오고, 또 오고, 계속 오고. 이게 아내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비가 엄청 많이 왔다. 차를 가지고 카센터로 갔는데 의외로 바로 수리가 됐다. 다시 집에 들렀다. 가면서 빵 가게에 들러 빵 4개를 샀다. 소윤이가 좋아하는 소금빵, 시윤이가 좋아하는 단팥빵, 서윤이가 좋아하는 소보로빵, 아내가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맛있다고 했던 소시지를 넣은 소금빵. 오후 시간은 부디 더 즐겁게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빵이 즐거운 오후를 여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만 보였다. 일단 셋은 다 괜찮아 보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까도 괜찮았다. 시윤이는 아까는 안 괜찮았는데 이때는 괜찮아 보였다.


“엄마는?”

“안방 화장실에 계셔여”

“들어간 지 한참 되셨어?”

“어, 그렇게 한참은 아니예여”


느낌이 왔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러 들어간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눈물도 생리현상인가. 아무튼 아내가 나오면 인사라도 하고 나가려고 기다렸는데 역시나 금방 나오지 않았다. 소윤이가 화장실 앞에 가서


“엄마. 아빠가 오셨어여”


라고 얘기하니까 문을 열고 나왔다. 벌개진 눈으로. 나도 오랜만이었다. 집에서 나와 일터로 가는 데 이렇게 마음이 무겁고 불편한 게.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지친 아내의 목소리 뒤로 시윤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짜증 혹은 외침에 가까웠다. 아주 사소한 이유로 갑자기 또 짜증을 냈나 본 데 아내에게는 더 이상 받아주거나 기다려 줄 힘이 없었나 보다.


시윤이와 통화를 했다. 이번에는 조금 엄하게 얘기했다.


“시윤아. 이제 진짜 그만해. 충분히 많이 했어. 속상한 게 있으면 혼자 방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스리고 나오든지 아니면 하루 종일 거기 있든지 해. 다른 사람한테 니 기분대로 짜증 내고 함부로 대하는 건 그만해. 이건 지금 아빠가 경고하는 거야. 누나한테 동생한테, 특별히 엄마한테 짜증 그만 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말로 해. 더 이상 짜증 내지 마”


사실 나도 짜증이 좀 났다. 아침부터 쉬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와 메시지에, 어떻게든 해 보려고 집에도 일부러 들렀는데 집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득달같이 걸려오는 전화에. 차라리 나도 그 현장에 있었으면 후회는 할지언정 소래를 빽 지르고 상황을 조용히 만들거나, 시윤이가 좀 누그러들도록 함께 방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거나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전화로 하다 보니 그러기가 어려웠고, 아내를 위해서라도 일단은 시윤이가 짜증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그 뒤로는 퇴근하기 전까지 연락을 받은 게 없었다. 퇴근 무렵에 소윤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어디예여?”

“카페야”

“언제 와여?”

“이제 가려고. 왜?”

“그냥 궁금해서여”

“엄마는 뭐 하셔?”

“엄마는 저녁 준비해여”

“시윤이는?”

“시윤이여? 잠깐만여? 어, 서윤이랑 놀고 있어여”

“그래 알았어. 아빠 이제 갈게”


당장은 평안한 분위기를 되찾은 듯했다.


저녁을 먹고 또 나가야 했다. 미용실 예약이 있었다. 하필 이런 날 저녁 시간에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게 매우 부담스럽고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저녁 다 먹고 잘 준비도 끝내고 눕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 별 일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미용실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아직 안 자고 있었다. 각자 자기 자리에는 누워 있었다. 아내는 안방에서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난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느껴졌던 뜨겁고 치열했던 낮 시간은 감쪽같이 사라진, 아주 고요한 밤이었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좋아한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딱 그 소리만 들릴 때 기분이 너무 좋다. 모두 누운 후 듣는 선풍기 소리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다소 차분해졌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아내와 대화를 나눴다. 난 얘기를 거의 안 했고 아내가 많이 했다. 일부러 말을 안 한 것도 있지만, 많은 순간에는 딱히 보탤 말이 없기도 했다. ‘아내(여자)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고 일단 공감하라’는 시대의 메시지를 기계적으로 실천하는 차원도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따금씩 아내에게 몇 가지 질문 정도만 던졌다.


다들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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